<표> 역사단체들이 지적한 교학사 역사교과서 주요 오류
송고시간2013-09-10 21:01
쪽수 | 교학사 역사교과서 기술내용 | 진보 역사단체 반박내용 |
15쪽 |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방에 거주하 던 여러 집단이 공동체로 조직화되 고 황허 문명권의 확장에 따른 문화 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기원전 1천 년 동안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에서 민족의 원형이 성립되기 시작하였 다." |
우리 민족의 원형이 황허 문명 확 대의 파생물로 이해되는 문장. |
40쪽 | (발해 관련 서술에서) "당이 신라와 발해의 대립을 조장하여 신라와는 관계가 원활하지는 못하였다." |
발해와 신라의 관계의 관계가 원활 하지 못한 것이 당의 대립 조장 때 문이라고 이해할 근거 없음. |
256쪽 | "이승만을 대통령, 이동휘를 국무 총리로 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 공화정체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 부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1919.9)" |
254쪽의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 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하였다'는 서술과 충돌됨. |
262쪽 | (사료탐구-조선 청년 연합회의 결 성) "1920년에 결성된 조선 청년 연 합회는..." |
사료탐구에 제시한 지문은 장덕수 가 쓴 것이 아니라 북청 조우(趙 宇)의 기사임. 조선청년연합회가 아니라 조선청년회연합회임. |
283쪽 | (일제강점기 교통.통신의 발달과 공간 관념의 변화) "이에 자급자족 적 경제관념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 다." |
마치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한국인 들은 자급자족적 경제관념에서 벗 어나지 못한 것처럼 썼음. 일제식 민사학자들이 말하는 정체성 이론 에 근거한 서술임. |
290쪽 | (이승만의 임시 정부 승인 획득 운 동 항목 중 도움글에서) "이승만은 당시에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직접 자신의 목소리로 방송을 함으로써 국민들과 더욱 친밀하게 되었고, 광복 후 국민적 영웅이 될 수 있었 다." |
임시 정부 승인 운동의 주체는 이 승만이 아니라 임시정부임. 이를 마치 이승만이 계획하고 주도한 것 처럼 서술하는 것은 왜곡된 해석 임. 당시, 즉 일제 말기에 이승만 이 가장 존경받고 신뢰 받는 지도 자였다는 증거는 없음. |
298쪽. 303쪽 |
"대한민국은 자유와 독립을 위한 오랜 노력과 투쟁 끝에 성립되었 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자주 독립국으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해 방되었다." |
우리 민족의 해방을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의 연합국의 승리와 일본 의 패전에서 찾고 있음. 독립운동 등 자주적인 노력을 함께 서술하는 다른 교과서에 비해 타율적인 서 술이라고 할 수 있음. 집필기준에 도 위배되는 서술임. |
303쪽 |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는 연합국이 한반도에서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는 계획을 발 표하였다. 이 결정 사항에 대하여 처음에는 모든 정치 세력이 반대하 였다. 그러나 곧 찬탁과 반탁으로 입장이 갈라졌다. 조선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좌익 세력은 찬탁 을, 이승만과 김구를 중심으로 하 는 우익 세력은 반탁을 주장하였 다." |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안의 핵심은 임시 정부 수립 문제와 신 탁 통치 문제임. 좌익 세력은 임시 정부 수립안으로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안의 총체적 지지를 주장했지 '찬탁'을 주장하지는 않 았음. '좌익'에 대한 편견을 심어 놓기 위한 의도적인 왜곡임. |
305쪽 | "제주도에서는 4월 3일 남로당의 주도로 총선거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켜 경찰서와 공공기관을 습격 하였다. 이때 많은 경찰과 우익 인 사들이 살해당하였다. 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의 희생도 초래되었다(제주 4.3사 건)." |
제주 4.3사건에 대해 정부에 의한 진상보고서와 학계의 기존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바는 1947년 3.1절 기념대회 발포사건을 계기로 격화하기 시작한 것으로 특 히 미군정과 경찰, 우익세력의 대응 방식이 주요 요인이었음. 4.3사건을 4.3봉기만으로 축소하고,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이 일부 희생된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과잉진압으로 수 만 명의 제주도민들이 희생된 것으로 정부 조사에서 밝혀졌음. |
311쪽 | "...평더화이를 중공군 사령관으 로 하고..." |
'중공군'이라는 표현은 역사적으 로 정확한 표현이 아님. '중국 인 민 지원군'이 정확한 표현임. 중공 군은 중국군에 대한 비하의 표현 임. 이 용어는 중국 정부의 항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부적절한 용 어임. |
323쪽 | "...정부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부정 선거를 자행 하였다(3.15 부정 선거)." |
부정 선거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는 것이었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것 은 당연히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당 선시키기 위한 것임. 사실 관계 축 소. |
323쪽 | "4월 11일에는 시위로 숨진 학생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서 인양" |
김주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진 것이라는 사실을 숨겨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고 있음. |
324쪽 | (5.16 쿠데타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장면 정부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특히, 북한과의 대치 상황 에서 군비축소를 약속하고, 사회적 으로 치안이 어려운 상황에서 4,500여 명의 경찰을 해고하고 경 찰력의 대부분을 타지로 전출시키 는 등 경찰의 치안 능력을 악화시 켜 혼란을 자초하였다." |
당시 "경찰 중립화"로 주로 이야 기됐던 민주당의 경찰 개혁을 치안 을 약화시키고 혼란을 자초한 것으 로 평가하고 있음. 당시 경찰은 독 재정권을 유지하는 데 악용되었고, 4월혁명을 일으킨 3.15 부정선거에 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 |
324쪽 | "5.16 군사 정변은 헌정을 중단시 킨 쿠데타였다. 하지만 반공과 함 께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강조하였 다. 대통령 윤보선은 쿠데타를 인 정하였다. 육사 생도도 지지 시위 를 하였다. 미국은 곧바로 정권을 인정하였다." |
5.16 쿠데타를 미화하는 표현임. 쿠데타 발생 직후 미8군 사령관과 주미대리대사는 쿠데타 진압을 시 도했음. 반공과 자유 우방과의 유 대도 쿠데타를 합리화하는 명분이 되기는 어려움. 반공과 동맹국과의 유대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희생 도 불가피하다는 것인데, 학생들의 가치관에 큰 혼란을 주는 구절임. |
326쪽 | "이에 5월 18일 광주에서는 민주화 를 요구하는 대학생의 시위가 일어 났다. 하지만 진압군이 투입되면서 대규모 시위로 번지게 되었다 (5.18 민주화운동). 충돌은 유혈화 되었고 시위대의 일부가 무장을 하 고 도청을 점거하였다" |
공수부대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 도청 앞에서 이뤄진 계엄군의 대대 적인 발포 등 당시 신군부와 계엄 군이 자행한 폭력을 명확하게 서술 하지 않고 시위대의 폭력 행사만 부각시키고 있음. |
※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민족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 제공
(서울=연합뉴스)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13/09/10 21:0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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