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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학살피해자 명부>②순국·피살당시 참혹한 진상

송고시간2013-11-24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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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日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부 공개
3·1운동·日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부 공개

(서울=연합뉴스) 백승렬 기자 = 박경국 국가기록원장과 직원들이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한국 정부가 1953년에 전국적으로 조사한 3·1운동과 일본 관동(關東·간토)대지진 피살자 명부를 공개하고 있다. 2013.11.19
srbaek@yna.co.kr


日관동대지진 내부소요 우려해 조선인을 희생자로 악용

(서울=연합뉴스) 이 율 기자 = 일제강점기 36년간 각종 수난에 관한 전국적 실태조사 결과인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와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 '일정시 피징용자 명부' 등 67권, 23만명의 명부에 담긴 학살과 순국의 기록은 참상 그 자체다.

이번 명부 발견으로 그동안 역사의 뒤편에 가려져 있던 관동대지진 피살자들이나 3·1운동을 하다 희생된 순국선열들, 강제징용자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희생일시와 상황 등 실상이 밝혀지면서 일제가 숨기려 했던 잔혹사가 드러나게 됐다.

◇ 죽창·쇠갈퀴·곡괭이로 '개 잡듯이'…관동대학살의 진실

24일 김도형 독립기념관 연구소 연구위원이 국가기록원의 의뢰를 받아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를 분석한 바로는 1923년 9월 발생한 관동(關東·간토)대지진 때 도쿄 일원에서 잔인하게 학살된 198명의 신상이 정확하게 파악됐다.

관동대지진 때 희생된 한국인의 명단이 이렇게 실질적으로 알려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규모 7.9의 대지진이 도쿄와 요코하마 등 일본 관동지방을 강타해 9만명이 사망하고 10만명이 부상했으며 4만3천명이 행방불명됐다.

대지진이 발생한 다음 날부터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폭탄을 소지하고, 방화를 하고, 우물에 독극물을 집어던지고 있다'는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3·1운동 피살자 명부
3·1운동 피살자 명부

(서울=연합뉴스) 한국 정부가 1953년 전국적으로 조사한 3·1운동과 일본 관동(關東·간토)대지진 피살자 명부가 사상 처음으로 발견, 공개됐다.
국가기록원은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1953년 이승만 정부가 작성한 '3·1운동시 피살자 명부(1권·630명)',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1권·290명)', '일정(日政)시 피징용(징병)자 명부(65권·22만9천781명)' 등 67권에 대한 분석결과를 공개했다. 사진은 3·1운동 피살자 명부. 2013.11.19 << 국가기록원 제공 >>
photo@yna.co.kr

한국인 관련 유언비어 때문에 지진 발생 다음날 오후부터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대와 경찰이 출동하고 각지에서 자경단이라는 자위집단이 만들어져 죽창과 쇠갈퀴, 곡괭이로 개 잡듯이 한국인들을 학살했다고 명부는 증언하고 있다.

경남 창녕 출신의 한용선(23)씨는 쇠갈퀴로 개 잡듯이, 경남 함안 출신의 차학기(40)씨는 일본인이 죽창으로 복부를 찔러 학살했다.

경남 밀양 출신의 최덕용(26)씨와 이덕술(22)씨는 '군중이 피습해 살해'당했고, 울산 출신의 박남필(39)씨와 최상근(68)씨는 곡괭이로 학살됐다.

경북 예천군의 이수흥(24)씨는 도쿄 동근정에서 일본인에게 총살을 당했고 함남 단천군 출신 김민수씨와 김석현씨는 도쿄 신전구에서, 오석주는 동경제대 문전에서 총살당했다.

경남 합천군 합천면 서산리 출신인 이광국(26), 이광명(17), 이판개(26), 이소개(2) 등 두살배기 갓난아기를 포함한 일가족 4명이 학살됐고 함경도에 연고가 있는 박모(30)씨는 일본 헌병에게 총살당했다.

김도형 연구위원은 "일본 정부는 피해대책이 미진해 여론이 험악해지고 이에 대한 불만이 곧 민중폭동으로 이어질 것에 지레 겁을 먹고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돌파구로 무고한 한국인을 이용했다"면서 "명부에는 헌병이나 경찰은 물론 '민중'에게 타살된 사례도 나와 모두가 학살에 가담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한국인들은 대개가 직공, 근로자, 광산노동자, 하루 벌이 노동자 등 육체노동을 하는 노동자들로 일본어를 하지 못하고 임금도 낮고 최하급 생활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생생하게 되살아난 3·1운동의 상징 '천안 아우내장터'

'3·1운동시 피살자 명부'에는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오후 1시께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일어났던 3·1운동 시위의 주요 인물인 유관순 열사와 그 부모, 시위주동자 조인원씨가 모두 등장한다.

일정(日政)시 피징용(징병)자 명부
일정(日政)시 피징용(징병)자 명부

(서울=연합뉴스) 한국 정부가 1953년 전국적으로 조사한 3·1운동과 일본 관동(關東·간토)대지진 피살자 명부가 사상 처음으로 발견, 공개됐다.
국가기록원은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1953년 이승만 정부가 작성한 '3·1운동시 피살자 명부(1권·630명)', '일본 진재(震災)시 피살자 명부(1권·290명)', '일정(日政)시 피징용(징병)자 명부(65권·22만9천781명)' 등 67권에 대한 분석결과를 공개했다. 사진은 일정(日政)시 피징용(징병)자 명부. 2013.11.19 << 국가기록원 제공 >>
photo@yna.co.kr

당시에는 대한독립이라는 큰 깃발을 세워놓고 3천여명이 모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조인원씨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고, 유관순 열사는 3천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시위를 진행했다.

명부를 보면 유관순 열사의 순국 당시 주소는 천안군 동면 용두리, 순국 장소는 서대문형무소로 나온다. 순국 상황란에는 "3·1독립 운동만세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被檢)돼 옥중에서 타살(打殺) 당함"이라고 기재됐다. 조인원씨는 3년형을 받아 출옥했다고 기재돼 있다.

유 열사 부친인 유중권 열사는 "3·1운동 독립만세로 인해 총살당했다"고 명부에 적혀 있고, 어머니 이씨(李氏)도 피살됐다. 유 열사의 오빠는 다른 곳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가 역시 옥사했다.

명부에는 유중권 열사와 이씨를 포함해 20명이 같은 장소·날짜·상황에서 순국했다고 적시돼 있다.

서울 이화학당 고등과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고,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시위를 주도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는 천안·연기·청주·진천 등의 학교와 교회를 방문해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천안 아우내장터에서 시위를 지휘하다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됐다.

유 열사는 이후 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재판과정에서 일본인 재판관이 무슨 권리로 조선인을 재판하냐며 재판을 거부해 최고형인 7년형이 선고됐다. 유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옥사했다. 유 열사의 부모는 아우내 장터에서 모두 사망했고, 집은 불탔다.

김용달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일본정부는 3·1운동을 조선만세 소요사건으로 부르며, 조선인 몇 명이 시위에 참가해 진압과정에서 몇 명이 죽고 소요가 진정됐다는 식으로 기록해 숫자 외에 누가 죽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명부에는 순국자들의 이름과 연령, 순국장소, 상황 등이 나왔기 때문에 처음으로 순국자 개인이 어떻게 순국했는지 알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대표적 항일 독립운동이었던 3·1운동의 희생자 규모는 당시 일제 통계를 보면 발발 이후 3개월간 시위진압과정에서 사망자 7천509명, 부상자 1만5천961명, 구금자 4만6천948명으로 추산된다.

yulsid@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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