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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러시아에 '셜록 홈스'가 있었다?

송고시간2015-05-19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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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가초프 체포 1등 공신 '아르하로프'

(서울=연합뉴스) 지일우 기자 = 1773년 예카테리나 2세 치하의 러시아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반란 당일 40명에 불과했던 반란군 규모는 그날 밤께 이미 300명을 넘어섰고 1주일이 지나고 나서는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그만큼 제정 러시아 시대의 불평등이 극에 달했음을 방증하는 사건으로, 이 반란을 일명 푸가초프의 난이라고 한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걸쳐 러시아 중앙부에서 남방 변경지대로 이주해 자치적 군사공동체를 형성한 농민집단 '카자흐' 출신의 에멜리얀 이바노비치 푸가초프는 1773년 9월 28일 자신을 표트르 3세로 칭하면서 농노해방·인두세 폐지 등을 주창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한때 볼가강과 우랄 유역으로 확대되기도 했지만 반란군은 낙후된 장비와 조직·계획성의 결함으로 결국 정부군에 패했고 푸가초프는 이듬해 체포돼 1775년 1월 10일 모스크바의 볼로트나야 광장에서 사지가 찢기는 형벌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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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반란이 농노해방 등을 기치로 했다지만 주동자인 푸가초프에 대한 평가는 분분한 것 같다. 진정한 사나이로, '민중을 위한 복수자'라는 호평이 있는 반면 점령한 요새 사령관의 부인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겁탈하고 그 사령관을 부인의 면전에서 교수형에 처한 뒤 능욕한 부인을 다시 측근에게 넘겨주기도 하는 등 '피에 굶주린 사디스트'라는 악평도 있다.

푸가초프는 농민반란을 일으키기 전 세 차례의 큰 전투와 전쟁에 참여했다. 7년에 걸친 러시아-프러시아 전쟁(1756~1763)과 폴란드로 도주한 그리스 정교 내 비개혁파들에 대한 추적과 체포 작전(1765~1766), 그리고 제1차 러시아-터키전쟁(1768~1770)이 그것으로, 푸가초프는 초급 장교인 소위로 성실히 복무했다고 한다. 카자흐인으로 제정 러시아의 장교였던 셈이다.

푸가초프의 난은 당시의 시대상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농민반란이 아니라 한 하급 장교의 분노에 의한 단순 분규라는 평가도 있다. 푸가초프 자신의 신분과 다혈질적인 성향, 그리고 소속된 부대에서의 부당한 처우 탓에 빚어진 사태라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푸가초프는 앞서 세 차례의 전투·전쟁 이후 크게 아팠다고 한다. '가슴과 발이 썩어들어 가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퇴역을 신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 때문에 침상도 제대로 없는 야전 병원에서 혼자 병마와 싸우다가 죽은 양의 허파를 먹고 3일간 고통을 받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병세가 나아졌다고 한다. 귀족의 자제였으면 당연히 퇴역이 허락됐겠지만 푸가초프는 이후에도 세 차례의 퇴역 신청에서 모두 퇴짜를 맞고 3년간 12차례나 탈영했다가 붙잡혔다.

붙잡힐 때마다 모진 고문을 당했고 일종의 '연좌제' 탓에 어머니까지 체포돼 옥사했으며 부인은 평생 세인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이런 모진 상황 속에서 푸가초프는 결국 탈영에 성공했지만 당초 자신은 반란 주도는 물론 '기적적으로 살아난 표트르 3세'가 될 생각도 전혀 없었으며 1773년 9월 반란을 일으키기 전까지도 반란에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푸가초프는 결국 동료들의 압력에 의해 반란의 선봉에 섰고 1년여 반란을 이끌다가 1774년 말 체포돼 이듬해 1월 1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런 푸가초프의 체포와 형집행의 배후에 18세기 러시아의 '셜록 홈스'가 있었다고 A&F 18일자 인터넷판이 소개했다. 예카테리나 2세 당시 모스크바 경시총감이었던 니콜라이 아르하로프(1742~1814)와 후에 모스크바 총독이 된 그의 동생 이반 아르하로프(1744~1815)가 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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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인 니콜라이는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지만 타고난 직관력과 분석력을 지닌 인물로, 1771년 모스크바에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온갖 약탈과 살인이 횡행했던 이른바 '페스트 반란'때 무자비한 형집행자로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 공로로 예카테리나 2세는 니콜라이에게 대령 계급을 부여하면서 모스크바 경시총감으로 임명했다.

니콜라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사를 했는지는 명확지 않지만 A&F는 그가 우범자들로 구성된 광범위한 첩보망을 가동해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고 전했다. 본인 스스로 강도와 살인사건에 매달려 직접 심문까지 했는데 속마음까지 꿰뚫는 듯한 심문으로 말미암아 범죄자들조차 그를 마법사로 여겼다고 한다.

이런 능력 탓에 예카테리나 2세는 당시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큰 사건이 발생하거나 국가적 중대사건이 발생할 때면 니콜라이를 불러들였고 그때마다 니콜라이는 기대에 부응했다고 한다. 이런 국가적 중대사 중 하나가 푸가초프에 대한 추적으로, 니콜라이는 1774년 이 작전에 적극 참여해 이듬해 1월 10일 형 집행을 직접 지휘했다.

제정 러시아 시절 시인 이반 드미트리예프는 "우리는 볼로토(볼로트나야 광장)에 도착했다. 중앙에 단두대가 세워져 있었다. 바로 그곳에 니콜라이 경시총감도 관리들과 전령 장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주변 모든 가옥과 상점들의 지붕과 높은 곳은 남녀노소는 물론 다양한 계층의 인파로 빼곡했다"고 푸가초프 형 집행 날을 회상했다.

니콜라이는 1781년 모스크바 총독으로 임명됐다가 불과 몇년 후 다시 승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으로 임명됐다고 한다. 동생인 이반 역시 형의 비호 아래 승승장구해 1797년 모스크바 총독으로 임명됐으며 모스크바 경비대의 책임을 맡았다. 시민들은 이 부대를 '아르하롭스키 경비대'로 불렀을 정도로 당시 아르하로프 형제의 위세는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ciw@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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