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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년> 근로정신대 승소 뒤에는 '일본 양심세력' 있었다

송고시간2015-07-0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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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에 맞선 근로정신대 나고야 지원회 29년간 활약진실과 정의의 발걸음, 근로정신대 인권회복의 '주춧돌'

강제동원된 근로정신대 소녀들
강제동원된 근로정신대 소녀들

(광주=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지난 6월 24일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선고에서 앞선 1심에 이어 연이어 승소했다. 1심 광주지법의 승소는 지난 1999년 일본에서 첫 소송을 제기한 지 14년 만이었다. 1986년부터 근로정신대 문제를 파헤치고, 1999년 소송을 제기하는 등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 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의 도움이 컸다. 사진은 일제시절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노역하는 근로정신대 소녀들의 자료사진. 2015.7.1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pch80@yna.co.kr

(광주=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지난 6월24일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선고가 있은 광주고등법원 법정.

판사의 최종 선고가 나자 방청석에 있던 일본인 다카하시 마코토(73·高橋信)씨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문제를 가장 먼저 파헤치고, 가장 앞서 싸워온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 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나고야 지원회)의 공동대표다.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재판에서 할머니들이 1심에 이어 승소한 순간 29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그의 눈앞을 스쳐갔다.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다.

이 세월은 '악의 평범성'에 맞선 기간이기도 하다.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장애인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는 평범한 사람에 의해 행해진다는 게 악의 평범성이다.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정의한 말이다.

진실과 정의만 쫓아 온 일본인들의 활약상을 다카하시 대표의 목소리로 들어봤다.

◇ "전쟁 비극 반복 안돼"…근로정신대를 세상에 알리다

승소후 눈을 질끈 감는 다카하시 대표
승소후 눈을 질끈 감는 다카하시 대표

(광주=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지난 6월 24일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선고에서 앞선 1심에 이어 연이어 승소했다. 1심 광주지법의 승소는 지난 1999년 일본에서 첫 소송을 제기한 지 14년 만이었다. 1986년부터 근로정신대 문제를 파헤치고, 1999년 소송을 제기하는 등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 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의 도움이 컸다. 사진은 항소심 승소 당시 두 눈을 질끈 감은 다카하시 마코토(가운데) 나고야 지원회 대표의 모습. 2015.7.1 pch80@yna.co.kr

다카하시 대표가 근로정신대 문제에 천착한 것은 1986년부터였다.

일본 나고야 아이치현 나고야시의 한 고등학교에서 세계사를 가르치던 그는 근로정신대의 존재를 알게 됐다. 교사 모임 회원들과 군사공업 도시인 나고야시의 조선인 강제연행 실태를 조사한 덕분이었다.

다카하시 대표는 1일 "전쟁을 마친지 40여년이 지난 시점에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까 생각했죠. 첫 작업이 조선인 강제 연행 사건을 새로 발굴하는 것이었습니다."고 회고했다.

자신의 제자보다 어린 13~14세 소녀들이 강제연행돼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제작소에서 진주만 폭격 당시 '가미카제' 자살 공격으로 유명한 '제로센' 전투기를 생산했던 사실도 알게됐다.

1944년 5월 이 항공제작소에만 한국인 소녀 300여명이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전남과 충남 지역에서 끌려간 이들 가운데 6명은 1944년 12월 7일 도난카이 지진 때 숨졌다.

미쓰비시 측이 지진 희생자 위령제를 지내면서도 한국 소녀들의 명부를 숨긴 사실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교사의 양심으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진실규명 작업을 시작한 동기다. 지진 희생자 6명 모두 일본 이름밖에 없어 입수한 명부에 남은 본적지 주소를 단서로 수소문에 나섰다.

군사정권 시절 한국은 관공서 협조도 어려웠다. 일본인이 한국을 직접 방문하기도 쉽지 않았다. 주소 하나만 들고 제주도 등 방방곡곡을 헤매 희생자 5명의 유족을 만났다.

다카하시 대표 등은 곧장 추도기념비 건립에 나서 모금 운동을 벌였다. 일본 시민의 반응은 예상보다 좋았다. 희생자의 유족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모금액은 애초 목표의 두 배에 이르는 200만엔이나 됐다.

"다시는 이 슬픔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진실을 여기에 새긴다"는 비문 아래 소녀 5명의 이름이 아로새겨졌다.

'진실을 여기에 새긴다'
'진실을 여기에 새긴다'

(광주=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지난 6월 24일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선고에서 앞선 1심에 이어 연이어 승소했다. 1심 광주지법의 승소는 지난 1999년 일본에서 첫 소송을 제기한 지 14년 만이었다. 1986년부터 근로정신대 문제를 파헤치고, 1999년 소송을 제기하는 등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 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의 도움이 컸다. 사진은 지난 1988년 '다시는 이 슬픔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진실을 여기에 새긴다'라고 적힌 근로정신대 지진피해 희생자 추도기념비에서 눈물 흘리는 유족들의 모습. 2015.7.1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pch80@yna.co.kr

'아이코'라는 이름의 희생자는 1988년 제막식 때까지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일본 이름 옆 한국 이름을 적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일본에서 보기드문 양심세력인 다카하시 대표 등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추적해 2001년에는 아이코의 한국 이름인 '오길애'를 새겨넣을 수 있었다.

제막식에 참석한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족 김중곤씨는 "일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눈물을 흘렸어요. 눈물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잖아요. '야…. 이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니구나!'라고 느꼈어요"라고 회상했다.

◇ '법의 벽' 앞에 놓인 몇 겹의 장벽에 맞서다…힘겨운 손해배상 소송

생존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만난 다카하시 대표 등의 증언으로 흩어진 진실의 조각을 꿰맞췄다.

할머니들의 한을 풀기 위한 소송을 추진했지만, 뜻밖의 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종군 위안부'와 '근로 정신대'에 대한 구별이 뚜렷하지 않은 시대의 오인이었다.

"한국에서 정신대라는 용어는 곧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피해자 대부분이 근로정신대 피해자라는 사실을 40여년 이상 숨기고 살고 있다는 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소송은 무리라고 유족들이 오히려 만류할 정도였으니까요."

어렵사리 1997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을 통해 소송이 추진됐다. 1998년 8월 44명의 변호단이 결성됐고, 그해 11월에는 '나고야 소송 지원회'가 결성됐다.

일본 법원에서 행진하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
일본 법원에서 행진하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

(광주=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지난 6월 24일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선고에서 앞선 1심에 이어 연이어 승소했다. 1심 광주지법의 승소는 지난 1999년 일본에서 첫 소송을 제기한지 14년 만이었다. 1986년부터 근로정신대 문제를 파헤치고, 1999년 소송을 제기하는 등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 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의 도움이 컸다. 사진은 지난 1999년 일본 재판부에 소송을 제기한 후 법원 앞을 행진하는 근로정신대 할머니들과 다카하시 마코토 나고야지원회 대표의 모습. 2015.7.1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pch80@yna.co.kr

1999년 3·1절에 맞춰 원고 5명의 이름으로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나고야 지방재판소에 제기했고, 2000년 원고 3명이 추가 소송을 했다.

다카하시 대표는 한국에서 온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굳게 손을 잡고 법원 앞을 행진했던 순간을 아직 잊지 못한다.

할머니들의 재판을 돕는 일은 오롯이 나고야 지원회의 몫이었다.

재판이 진행된 10년간 29회에 걸친 변론 동안 나고야 지원회는 일본을 방문하는 원고들의 항공·교통·숙박비를 부담했다.

무료변론을 자처한 일본 변호인단과 함께 나고야 소송지원회가 증언 청취, 자료 조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것만 30여회. 다카하시 대표는 80여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변호인단의 126차례에 걸친 회의로 축적된 변론 자료만 수천 페이지에 달했다.

하지만, 노력의 결과는 참담했다. 2005년 나고야지방재판소, 2007년 나고야 고등재판소, 2008년 일본 최고재판소 모두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 끝이 없는 소송…여전히 일본에서 '근로정신대'를 외치는 사람들

그러나 한국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할머니들은 광주지법·광주고법의 1, 2심에서 잇따라 승소했다.

근로정신대 문제 알리는 나고야 지원회
근로정신대 문제 알리는 나고야 지원회

(광주=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지난 6월 24일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이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 선고에서 앞선 1심에 이어 연이어 승소했다. 1심 광주지법의 승소는 지난 1999년 일본에서 첫 소송을 제기한 지 14년 만이었다. 1986년부터 근로정신대 문제를 파헤치고, 1999년 소송을 제기하는 등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 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의 도움이 컸다. 사진은 일본 도쿄 미쓰비시 본사 인근에서 매주 금요집회를 진행하며 근로정신대 문제를 알리는 나고야 지원회와 다카하시 대표의 모습. 2015.7.1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제공>>
pch80@yna.co.kr

광주지법의 승소는 일본에서 첫 소송을 제기한 지 14년 만이었다. 10년간 일본 소송 과정에서 쌓은 자료는 승소의 밑거름이 됐다.

그러나 소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쓰비시 측은 할머니들의 무덤까지 소송을 끌고 가려는 듯 대법원 상고를 할 것으로 보인다.

1999년 이후 양국에서 소송이 이어지는 동안 원고 2명이 숨졌으며 건강문제로 다른 원고 1명은 중도포기했다.

다카하시 대표 등은 광주에서 2009년 결성된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시민모임)과 함께 미쓰비시 규탄 행동을 이어간다.

나고야 지원회는 매주 나고야에서 도쿄 미쓰비시 본사까지 300㎞ 이동해 금요행동을 벌인다.

'일본 사람이냐, 한국 사람이냐'는 조롱에도 식지 않는 이들의 열정은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에게 다른 일본인들이 남긴 상처를 보듬는 감동을 준다.

나고야 지원회가 그동안 쓴 돈만 약 5천600만엔, 한화로 5억원에 달한다.

시민모임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진실과 정의만을 쫓아 달려온 나고야 지원회의 헌신은 한일 과거사 문제에 눈을 뜨고 식민지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투쟁의 불길을 광주에서 지필 수 있는 동력이었다"고 평가했다.

다카하시 대표는 "지난 29년 세월 중 교사 은퇴 직후인 2003년 3월 나고야 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재판에서 2시간여 동안 꼿꼿이 서서 증언한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꼽았다.

당시 은퇴한 은사의 '마지막 수업'과도 같은 법정 증언은 34명의 어린 제자가 방청했다. 스승은 제자들의 얼굴 하나하나에서 근로정신대 소녀들을 떠올렸다.

pch8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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