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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0년> 임진왜란 귀화장군 김충선 집성촌 '한일가교'

송고시간2015-07-0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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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이 2012년 한일우호관 세워 평화정신 계승…일본인 8천명 방문

일본에서 태어나 조선으로 귀화한 '김충선 장군'
일본에서 태어나 조선으로 귀화한 '김충선 장군'


(대구=연합뉴스) 광복 70년을 맞아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마을이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곳에는 일본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귀화한 김충선(金忠善·1571∼1642년) 장군(일본명 사야가)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뤄 생활하고 있다. 사진은 사당 녹동사(鹿洞祠)에 있는 김충선 장군 영정. 2015.7.3 <<달성 한일우호관>>
suho@yna.co.kr

(대구=연합뉴스) 최수호 기자 = 대구의 한 시골마을이 한국과 일본 간 민간교류의 가교역할을 톡톡히 한다.

광복 70년을 맞아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주목받는 곳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마을.

2일 대구 시내에서 경북 청도 쪽으로 20분가량 차를 몰고 가다가 이정표를 따라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어 2㎞가량 들어가자 한국 전통 복주머니 속에 폭 파묻혀 왼손을 든 높이 190㎝가량의 황금색 고양이 '마네키네코'(まねきねこ) 동상이 보였다. 이 고양이는 일본에서 '행운의 인형'이라고 한다.

황금색 동상 뒤편으로 '달성 한일우호관(韓日友好館)'이란 간판이 걸린 2층 건물이 보였다.

한 울타리로 둘러싼 우호관 오른쪽 공간에는 사당 등이 들어선 '녹동서원(鹿洞書院)'이 있다.

정원 곳곳에는 일본에서 주로 자란다는 홍매실 나무 몇 그루가 있다. 초록색 잎이 무성한 나무마다 작고 동그란 열매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서원 내 충절관에는 태극기와 함께 매일 일본 국기를 단다.

한국과 일본 풍경을 한데 간직한 서원과 우호관은 일본에서 태어나 조선으로 귀화한 김충선(金忠善·1571∼1642년) 장군(일본명 사야가·沙也可)의 평화 정신이 깃든 곳이다.

독도·위안부 등 문제로 양국 관계가 어그러져도 일본인 수천 명이 해마다 찾아와 그의 뜻을 기린 이유다.

김충선 장군 12세손 김상보(68) 사성김해김씨(賜姓金海金氏) 종친회장은 "한·일 2개 나라에서 2개 이름이 있는 선조는 양국 평화를 염원하셨고 후손들은 그 뜻을 받들고 있다"고 자랑했다.

◇ 조선 임금이 성·이름 하사한 일본 장수

모하당(慕夏堂) 김충선 장군은 본래 일본인으로 어릴 때부터 인륜을 중시했다고 한다. 더구나 예의지국(禮儀之國)인 조선을 흠모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일본 민간교류의 장…'달성 한일우호관'
한국·일본 민간교류의 장…'달성 한일우호관'


(대구=연합뉴스) 광복 70년을 맞아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마을이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두 나라 간 민간교류의 가교역할을 하는 '달성 한일우호관' 전경. 2015.7.3 <<달성 한일우호관>>
suho@yna.co.kr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왜군 장수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에 우선봉장으로서 부산에 상륙했다.

그러나 부하들에게 약탈을 금지하는 군령을 내리고, 조선 백성에게는 침략할 뜻이 없음을 알리는 효유서(曉諭書)를 돌렸다. 명분 없는 조선 침략에 불만을 품었던 까닭이다.

자기가 이끈 철포부대 소속 왜군 500명을 데리고 경상도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순했다. 그때 나이 21살이었다.

조선으로 귀화한 그는 울산, 경주 등을 돌며 왜군을 8차례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그 덕분에 도원수 권율의 추천으로 선조에게서 김씨 성을 하사받고 충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또 정이품(正二品) 자헌대부(資憲大夫) 관직에 올랐다.

김상보 종친회장은 "학계에서는 김충선 장군이 조총과 화약 제조법을 조선군에 전수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왜구에 밀렸던 조선 육군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도 소개했다.

김충선 장군은 임진왜란 외에 정유재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에서도 큰 공을 세워 '삼란공신(三亂功臣)'으로 불린다.

전란이 가라앉자 진주목사 장춘점 딸과 혼인하고 경상도 우록동(현 달성군 우록리) 한 골짜기에 터를 잡았다.

장군은 향약을 지어 주민들을 가르치다가 1642년(인조 20년) 7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임종을 앞두고 후손에게 "절대로 영달을 바라지 말 것이며 농사를 짓고 살아라. 여유 있을 때 틈틈이 공부하며 사람답게 보내라"는 유언을 남겼다.

사후 유림에서 조정에 소를 올려 그의 무덤 아래 녹동서원과 사당을 지었다.

서원 대문에는 향양문(向陽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비록 조선으로 귀화했지만, 남쪽에 있는 일본을 항상 그리워한 김충선 장군의 심경을 담은 글이다. 뒤편에는 사당 녹동사(鹿洞祠)를 세웠다. 뜰에는 모하공김공 유적비(慕夏公金公 遺蹟碑)가 있다.

후손들은 지금도 우록 마을에 집성촌을 이뤄 생활한다. 전국에 2천500세대 8천여명의 후손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일본 민간교류의 장…'달성 한일우호관'
한국·일본 민간교류의 장…'달성 한일우호관'


(대구=연합뉴스) 광복 70년을 맞아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마을이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두 나라 간 민간교류의 가교역할을 하는 '달성 한일우호관' 내부 모습. 2015.7.3 <<달성 한일우호관>>
suho@yna.co.kr

해마다 이곳 사원에서 음력 3월에 향사를,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묘사를 지낸다.

◇ 한·일 화합의 장…달성군 우록리 우호관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과거 김충선 장군에게 반감이 심했다고 한다. 일본을 저버리고 조선 편에 섰다는 이유 등에서다. 심지어 그의 일대기를 놓고 "조선이 꾸민 자작극"이라는 시선도 있었다.

김충선 장군 후손들은 "조선 처지에서는 귀화한 (우리) 할아버지가 충신이었지만 일본에서는 반역자였을 것이다"고 설명했다.

1960년대까지 이어진 이런 분위기는 일본 학자 등이 우록리 등을 찾아 본격 김충선 장군을 연구하자 차츰차츰 바뀌었다. 그 결과 김충선 장군 이야기는 1998년 한·일 두 나라 교과서에 실렸다.

후손들도 선조 뜻을 잇고자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가교 역할을 할 우호관 건립에 나섰다.

2012년 5월 개관한 우호관은 녹동서원 일대 터 6천135㎡에 국·시비 등 50억원을 들여 2층 건물로 지었다.

이곳에서는 김 장군 밀랍인형, 생애, 한일 교류사를 비롯해 근·현대 일본 유물, 생활 자료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한국전통 다도 체험, 한복·기모노 등 전통의상 체험, 전통놀이 체험 등도 할 수 있다.

개관 후 지금까지 우호관을 찾은 일본인은 7천900여명에 이른다.

일본 초·중등 학생과 일반인,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일본 자민당 총무회장 등 유력 정치인도 이곳을 찾았다.

김충선 장군이 400여년 전 바다를 건너와 실천하려던 평화정신이 후대에서 꽃을 피우는 징후다.

후손들은 이런 정신을 이으려고 우호관 맞은편에 '한일 우호촌'을 조성하는 방안 등도 검토한다.

김상보 종친회장은 "멀고도 가까운 것이 한일 관계라고 생각한다"며 "정치적 사안을 떠나 민간 교류를 활발히 한다면 두 나라 경색 관계가 풀릴 수 있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또 "두 나라 화해 분위기 조성에 후손들이 힘을 보태겠다"고 다짐했다.

su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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