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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恨과 고독으로 점철된 인생의 페이지

송고시간2015-10-2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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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恨과 고독으로 점철된 인생의 페이지 - 1

(서울=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 화가 천경자는 강렬한 채색화로 한국 화단에 큰 자취를 남겼지만 그의 개인사는 가족을 잃는 고통과 한 많은 사랑으로 얼룩졌다.

천경자가 화폭에 남긴 몽환적이고 애틋한 눈빛의 여인은 천 화백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자서전, 화백의 이야기를 다룬 도서를 비롯한 각종 자료에 서술된 내용을 인용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해 천경자의 일생을 조명했다.

◇ 성장기 = 천경자는 1924년 전남 고흥에서 군서기였던 아버지 천성욱과 무남독녀였던 어머니 박운아의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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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딸을 남장을 시켜 서당에까지 보낼 정도로 깨어 있던 외할아버지는 그 딸이 낳은 큰 손녀를 금지옥엽으로 예뻐하며 옥자(玉子) 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손녀는 밤마다 외할아버지의 무릎에 누워 '심청전' '흥부전' '수호지' '춘향전'을 듣다 잠이 들었고 천자문과 창까지 배우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보통학교 1학년 때 일본인 담임선생이 그림에 소질을 발견해냈고 대청마루 흰 횟가루 벽에 그린 여인상이 외할머니 눈에 띄어 매를 맞기도 한다.

◇ 일본 유학 =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 시절 혼담이 오가자 시집가기가 싫어 다듬잇돌 위에 앉아 미친 시늉을 한다. 1940년 16세 때 여수항을 출발해 도쿄 유학길에 오른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던 이 무렵 본명이던 옥자(玉子)를 버리고 경자(鏡子)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붙인다.

도쿄에서는 야수파나 입체파 등을 가르치던 서양화 고등과 보다는 곱고 섬세한 일본화 풍이 마음에 들어 일본화 고등과로 가서 모델을 보고 관찰해 섬세하게 사생하는 법을 집중적으로 교육받는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42년 제22회 선전에서 '조부'로 입선한다. 고혈압으로 반신불수가 된 몸이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의 모델이 되어준 외할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린 그림이다.

크지 않은 도시였던 고흥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오면서 하이힐에 양장을 차려입었던 천경자의 청년기는 그가 평생 간직했던 자부심의 바탕이 됐다.

◇ 순탄치 못했던 사랑 =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표를 구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던 자신을 도쿄역에서 우연히 만나 표를 건넨 명문대생 이철식과 1944년 결혼을 하고 1945년 첫 딸 혜선을 낳는다.

1946년부터 전남여고에서 교사생활을 했지만,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길지 못했다.

그러다 전남 모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두 번째 남편 김남중씨(작고)를 만난다. 1950년 전쟁 통에 여동생 옥희씨마저 폐병으로 숨진 후 남편 없이 두 아이를 기르던 천 화백은 유머 넘치고 건장했던 그에게 푹 빠지고 만다.

"청춘에 메말라 버린 나는 목 타는 사막에서 감로수를 마신 듯한 기분이었다"(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중)

그러나 그는 부인이 있는 사람이었고 주변에 항상 여성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또 떳떳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자괴감과 그의 변덕스러운 태도 때문에 천경자는 그를 기다리면서도 결별을 결심하는 고통의 나날을 이어간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기다리는 편이 된 나는 끝없이 두 갈래로 평행선을 이루는 철길을 아득히 바라보다가 그가 다가오는 소리에 가슴 설레고 형용할 수 없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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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화백이 낳은 자녀는 2남 2녀다. 첫 남편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김남중씨와 사이에 1남1녀를 둔다.

이 가운데 맏딸이 뉴욕에서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킨 이혜선씨다. 2006년 갤러리현대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 작품이었던 '모기장 안의 쫑쫑이'에 등장하는 모 서점 대표 김종우씨는 천경자의 막내였다.

아이들에게는 남미짱(혜선씨), 후닷닷(장남 남훈씨), 미도파(둘째딸 정희씨), 쫑쫑이(막내 종우씨)라는 애칭을 붙여주고 아이들을 모델로, 때로는 사랑했던 남자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물론 천 화백 그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여인의 모델은 그 자신이다.

◇ 스타 기질 = 천경자는 큰 키에 파격적인 색깔과 무늬의 옷, 위태로울 정도로 뾰족했던 하이힐, 머리를 둘러싸는 커다란 화관이나 얼굴을 감싸는 커다란 선글라스, 가늘게 그린 눈썹과 붉게 칠한 입술, 담배를 문 모습으로 주변을 압도했던 스타였다.

반달형의 눈과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당대의 패션리더이기도 했다.

언론과의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았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담긴 입담을 자랑한 그는 같은 시대를 살던 문인ㆍ화가들과도 진한 우정을 나눴다.

김환기, 박고석, 최순우, 김흥수, 유영국, 김현승, 고은 등의 남성 예술인과 박경리, 한말숙, 전숙희 등 여성 문인들과 단짝이었다. 또 세대를 뛰어넘어서는 이덕화, 조용필 등 연예인들과 함께한 시간들도 사진으로 남아있다.

1972년 베트남전 당시 문공부에서 베트남전 전쟁 기록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 열 사람을 파견한다는 기별을 받고 김기창, 박영선, 김원, 임직순 등 남자 화가들 틈에서 홍일점 종군화가가 된다.

맹호부대에 종군해 1주일간 종군하면서 M-16소총을 들고 꽃나무 그늘에 잠복하는 병사들, 연분홍 아오자이를 입고 자전거로 거리를 누비는 아가씨들을 많은 스케치와 담채 작품으로 남겼다.

타고난 글재주로 1955년의 '여인소묘' 등 단행본 15건과 수필집 10권, 신문잡지 연재 12건 등으로 대중과도 호흡했다.

2006년에 새로 편집돼 나온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는 쉰둘이던 1976년 잡지 '문학사상'에 연재하기 시작했던 글을 모아 1978년에 내놨던 것이 절판된 후 2006년 갤러리 현대 개인전과 때를 맞춰 새로 나온 것이다.

◇ 노년 = 천 화백의 노년에 가장 큰 고비는 1991년 '미인도' 위작 논란이었다.

당시 67세였던 천 화백은 "자기 그림도 몰라보는 화가"라는 수군거림 속에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천 화백은 4개월 후 다시 돌아와 그림에만 몰두하기 위해 카리브해, 자메이카, 멕시코로 스케치 여행을 떠난다.

생애 마지막 전시라고 생각하고 71세 때인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15년 만에 가진 대규모 전시는 8만명이 모여 줄을 서서 볼 정도로 대성공을 거둔다.

1998년 피붙이처럼 아끼던 채색화와 스케치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섬유공예를 하는 딸 이혜선씨를 찾아 뉴욕으로 떠났다가 2003년 뇌출혈로 쓰러진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여자로서는 팔자가 센 것으로 비친 천 화백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삶과 예술세계를 이렇게 풀이한다.

"내 과거를 열심히 살게 해 준 원동력은 '꿈'과 '사랑'과 '모정' 세 가지 요소였다고 생각한다. 꿈은 그림이라는 예술과 함께 호흡해왔고, 꿈이 아닌 현실로서도 늘 내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해 준 것이 사랑과 모정이었다"

시를 많이 쓰지는 않은 소설가 박경리는 오랜 지기인 천경자를 '고약한 예술가'로 부른 시 '천경자를 노래함'을 통해 천 화백의 성품과 기질을 소개했다.

"화가 천경자는/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멀리 갈 수도 없고/ 매일 만나다시피했던 명동시절이나/ 이십년 넘게/ 만나지 못하는 지금이나/ 거리는 멀어지지도/가까와지지도 않았다// 대담한 의상걸친/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허기도 탐욕도 아닌 원색을 느낀다.// 어딘지 나른해 뵈지만/ 분명하지 않을 때는 없었고/그의 언어를 시적이라한다면/ 속된 표현 아찔하게 감각적이다.// 마음만큼 행동하는 그는/들쑥날쑥/ 매끄러운 사람들 속에서/ 세월의 찬 바람을 더욱 배웠을 것이다.//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용기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

세간에선 천 화백의 삶을 프리다 칼로에 비유하기도 한다.

고통받은 내용은 달랐지만 한과 고독으로 점철된 그의 슬픈 전설의 페이지에도 사랑에 대한 아픔, 삶의 비애가 끊이지 않았다.

js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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