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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반공영화의 제도화 '적대와 동원의 문화정치'

송고시간2016-01-0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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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홍국기 기자 = 한국영화사에는 세계 어디에도 찾기 어려운 반공영화라는 기이한 장르가 있다.

반공적인 영화는 어느 나라에나 있을 수 있지만, 반공영화라는 하나의 장르 레이블을 가졌던 나라는 한국뿐이다.

신간 '적대와 동원의 문화정치'는 반공영화가 어떻게 한국에서 영화 장르가 될 수 있었는지 연대 순으로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반공영화가 처음부터 영화 장르로 구축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유사한 성격의 개별영화가 쌓이고 쌓여 어느 시점에서 소급돼 장르적 군집으로 묶였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전후였던 1949년부터 1956년까지 한국에서는 국가 내부의 적을 색출하라는 국가시책을 반영한 일련의 '간첩영화'가 있었다.

'성벽을 뚫고'(1949), '전우'(1949), '애정산맥'(1953), '운명의 손'(1954), '죽엄의 상자'(1955) 등의 간첩영화는 반공영화의 원형적 표상이었다.

같은 시기 형성된 전쟁영화는 간첩영화보다 반공영화로의 인식이 다소 미약했다.

'자유전선'(1955), '불사조의 언덕'(1955), '포화속의 십자가'(1956) 등은 전쟁의 내전적 성격보다 국제전적 성격을 강조했고, 당시 정부는 간첩 색출이 한미혈맹을 강조하는 것보다 더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영화도 반공국가를 건설하는 과정 속에 제작되며 훗날 반공영화 장르로 소급되는 데 필요한 맹아를 내포하고 있었다.

1960년대 들어서 전쟁영화와 간첩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상업적인 장르로 전성기를 누렸다. 박정희 군사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5인의 해병'(1961)으로 시작하는 1960년대 전쟁영화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을 거쳐 '빨간 마후라'(1964), '남과 북'(1965)에 이르러 확실하게 인기 장르가 됐다.

또 같은 시기 007시리즈의 세계적인 흥행 돌풍에 따라 한국에서도 소위 간첩영화 아류작들이 수없이 양산됐다.

국가는 이런 영화의 인기를 자신들의 반공선전 목적에 맞게 재정비하고 싶어했다. 1960년대 중반 이른바 반공영화의 제도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1964년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범국민적인 저항이 일자 박정희 정권은 강력한 반공 드라이브로 위기를 극복했다.

수많은 문인, 언론인, 예술가들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끌려갔고, 영화계에서는 이만희, 유현목 감독 등이 고초를 겪었다.

제재가 끝나자 보상을 통한 견인과 육성 작업이 시작됐다. 대종상에 반공영화 작품상과 반공영화 각본상이 신설되고, 국가선정 우수영화 3개 부문에 문예영화, 계몽영화와 함께 반공영화가 들어갔다. 국가가 반공영화 시나리오도 공모했다.

저자는 1960년대 중반 이후 상업 장르였던 전쟁영화와 간첩영화가 반공영화라는 외피를 부여받아 총체적으로 소급됐다고 강조한다.

오늘날 반공영화는 냉전의 해체와 민주화로 그 수명을 다했다고 할 수 있지만, 분단영화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 책은 하나의 장르를 시대와 이념의 변천에 따라 달리 부르고자 하는 분류의 의지를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정영권 지음. 소명출판. 316쪽. 2만2천원.

<신간> 반공영화의 제도화 '적대와 동원의 문화정치' - 2

redfla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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