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연합뉴스 최신기사
뉴스 검색어 입력 양식

<추왕훈의 데자뷔> 문제적 남자 숀 펜

송고시간2016-01-17 07:30

이 뉴스 공유하기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본문 글자 크기 조정
<추왕훈의 데자뷔> 문제적 남자 숀 펜 - 2

(서울=연합뉴스) 추왕훈 논설위원 = 성공한 영화인, 바람둥이, 악동, 사회운동가. 최근 멕시코 마약왕 인터뷰 사건으로 입길에 오르내리는 미국 영화배우 숀 펜이 지닌 여러 면모 가운데 일부다. 1960년생인 펜은 '할리우드의 금수저'라고 할만하다. 아버지는 '스타 트랙', '형사 콜롬보' 등 히트작을 만든 TV 드라마 감독 겸 배우 리오 펜(사망), 어머니는 TV 드라마 '보난자', '초원 위의 작은 집', 영화 '매그놀리아' 등에 출연한 에일린 라이언(88)이다. 형 마이클 펜(57)은 가수 겸 작곡가이고, 동생 크리스 펜은 배우로서 '저수지의 개들', '러시 아워' 등에 출연했으나 지난 2006년 40세에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이런 집안에서 자라난 펜이 연예인이 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4세 때 아버지가 연출한 '초원 위의 작은 집'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20대 이후에는 주로 영화 쪽에서 경력을 쌓았다. 부모의 후광이 배우 생활에 도움이 됐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배우로서 자질도 뛰어났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숀 펜은 2003년 '미스틱 리버', 2008년 '밀크'로 모든 배우들이 선망하는 아카데미 주연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수상은 못 했지만 아카데미상 후보로 지명된 것도 세 차례나 된다. 1991년 '인디언 러너'로 영화감독에 데뷔한 이래 감독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그가 극본을 쓰고 감독한 '인투 더 와일드'는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았고 남우조연상과 편집상 등 아카데미상 2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영화인으로서는 꽤 성공한 편이지만, 배우로서나 감독으로서 참여한 영화들이 대개 무겁고 진지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어 흥행에 대성공을 거뒀다고 볼 만한 작품은 없다. 호사가들은 그의 영화적 업적보다는 화려한 여성 편력에 더 관심이 많을 듯하다. 영화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팝가수 마돈나의 전남편이라고 하는 편이 더 빨리 통할지도 모른다. 그는 25살이던 1985년 2년 연상의 마돈나와 결혼했다 4년 만에 이혼했다. 마돈나와 헤어질 무렵부터 '포레스트 검프' 등에 출연한 여배우 로빈 라이트와 사귀기 시작해 두 아이를 낳은 상태에서 1991년 결혼했으나 몇 차례 이혼 소송을 냈다가 철회하는 곡절을 겪은 끝에 역시 4년 뒤 헤어졌다. 결코 '미남'이라고 볼 수 없는 외모지만, 펜에게는 정식 배우자 이외에도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에 출연한 여배우 엘리자베스 맥거번과는 약혼했으나 마돈나와 결혼하기 전 파혼했고 로빈 라이트와 동거하는 와중에 가수 주얼(본명 주얼 킬처)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스칼렛 조핸슨, 셜리스 시어런, 나탈리 포트먼 등 할리우드의 '대표 미녀'들과 체코 출신의 슈퍼모델 페트라 넴코바도 '펜의 여자'로 거론됐다. 지난해에는 TV 드라마 'CSI : NY' 등에 출연한 캐나다 출신 TV 탤런트 이매뉴얼 보제와 사귄다는 연예 매체의 보도가 나왔다.

<추왕훈의 데자뷔> 문제적 남자 숀 펜 - 3

내로라하는 여성들과의 관계로 화제를 뿌리고 다닌 펜 주변에는 당연히 파파라치가 들끓었고 이에 신물이 난 그는 혐오감을 표출하는 정도를 넘어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당대 최고의 엔터테이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마돈나와 결혼생활을 할 때 파파라치와의 충돌이 잦았는데, 1986년에는 아내 마돈나와 함께 방문한 마카오에서 호텔 방에 침입한 파파라치를 폭행한 혐의로 구속됐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유치장을 탈출했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그는 이후에 마카오 당국으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1987년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촬영장에서 한 카메라맨을 폭행하고 사진기를 박살 낸 혐의로 구속돼 60일간 감옥살이를 했다. 마돈나와의 결혼 시절 가정 폭력을 행사하였다는 구설도 끊이지 않았다. 할리우드에서는 술고래이자 골초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이런 '악동'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진보적인 사회운동이나 재난구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오고 있다. 1992년 흑인 폭동이 발생한 로스앤젤레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막대한 피해가 발생한 미국 뉴올리언스, 그리고 2012년 대지진이 발생한 파키스탄 등 재난의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구호활동을 펼쳤다.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때는 구호조직을 결성해 수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난민 캠프를 설치하고 운영했다. 이 공로로 아이티 역사상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무임소대사에 임명되기도 했고 2012년에는 노벨평화상 수상자 총회에서 세계 평화에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피스 서밋 어워드'를 받기도 했다. 펜은 할리우드의 진보적 영화인들이 일반적으로 지지하고 참여하는 동성애자 옹호, 이민자ㆍ유색인종 등 소수자 보호 활동 이외에 반전ㆍ평화운동에 적극적이다. 특히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나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정도를 훨씬 넘어 웬만한 정치가 뺨치는 수준의 반대 운동을 펼쳐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의 이 같은 반전ㆍ평화운동은 '언론 활동'과도 연관돼 있다. 2002년과 2003년에는 사비를 들여 워싱턴포스트와 뉴욕 타임스에 부시의 이라크 정책을 비판하는 의견 광고를 게재했다. '프리랜서' 언론인의 자격으로 대표적인 반미 국가인 이란과 이라크, 리비아를 방문했고 2007년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당시), 2008년 쿠바의 라울 카스트로 혁명평의회 의장을 만나 인터뷰했으며 여러 매체에 관련 기사를 기고했다. 차베스 대통령과는 절친한 사이가 돼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만났고 그의 선거 캠페인에까지 참여했지만, 그의 야당탄압이나 독재에 대해서는 외면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펜은 영국의 말비나스(영국 지명으로는 포클랜드) 점령을 '식민주의'라고 비난하는가 하면 볼리비아에서는 향정신성의약품인 코카잎 씹기를 옹호하는 활동을 펼쳐 논란을 야기했다.

'언론인 숀 펜'은 멕시코의 악명높은 마약왕 호아킨 구스만 인터뷰로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다. 펜은 멕시코 감옥에 수감돼 있던 구스만이 영화처럼 탈옥한 지 3개월여 만인 지난해 10월 멕시코 산악지역의 은신처에서 구스만을 7시간 인터뷰하고 이후에도 전화와 메신저 등을 이용해 접촉을 이어갔다. 펜은 이와 같은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해 미국의 잡지 '롤링 스톤'에 실었다. 기사가 게재되기 전에 구스만에게 미리 보여주고 '검열'까지 받았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구스만은 마약 판매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에 대해 말하면서 "내가 없더라도 마약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펜도 "구스만이 다른 마약상에 비해 덜 폭력적"이라면서 두둔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수많은 선량한 시민을 마약중독자로 만들고 잔혹 무도한 살상을 서슴지 않는 마약조직의 두목을 동정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이 기사에 세계적인 비난이 쏟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추왕훈의 데자뷔> 문제적 남자 숀 펜 - 4

어느 모로 보나 남부러울 것이 없는 펜이 무엇 때문에 '최고의 악질'에 속하는 범죄자를 만나기 위해 멕시코의 첩첩산중을 찾았는지, 그리고 이 잔인한 마약왕의 목소리를 굳이 세계에 전하려 했는지는 불확실하다. 악인이라 할지라도 화제성이 큰 인물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것은 '언론인'의 본능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 자체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굳이 저널리즘 스쿨의 기초 강좌를 듣지 않더라도 범죄를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방식의 보도를 자제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더구나 그는 젊은이들과 청소년들, 특히 영화인이나 예비 영화인들에게는 우상이자 롤 모델이다. 한국의 영화배우들을 인터뷰한 기사에도 "숀 펜과 같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영화배우로서도 물론 그렇지만 언론인으로서 자신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그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댓글쓰기
에디터스 픽Editor's Picks

영상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