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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수사진 "갈겨쓴 영문차트도 해독…화학전문가 다 됐어요"

송고시간2016-05-23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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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통역·전문지식 무장…가습기 수사 '새 트렌드' 눈길

'범죄의 전문화·외국인 사건 증가' 양상 보여주는 대표사례

[연합뉴스TV 제공]

[연합뉴스TV 제공]

(서울=연합뉴스) 최송아 기자 = "독성 화학물질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을 원료로 사용했습니까? 혹시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은 쓰지 않았나요? '물질안전보건자료'(MSDS)의 내용은 제대로 확인했습니까?"

존 리 옥시레킷벤키저(옥시) 전 대표의 소환조사를 계기로 분수령을 맞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 사건의 검찰 수사는 사건 본체 외에 수사 외적인 측면에서도 여타 사건과 다른 모습들이 눈에 띈다.

존 리 전 대표를 비롯해 외국인 관계자들이 줄줄이 나와 조사를 받고, 통상의 사건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전문 과학지식이 동원되고 있어서다.

23일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는 미국 국적의 존 리 전 대표는 영어로 조사를 받게 된다. 이달 19일 옥시 현직 외국인 임원 중 처음으로 검찰에 출석한 울리히 호스터바흐(49·독일)씨의 조사도 영어로 진행됐다.

통상 외국인이 검찰에서 조사를 받으면 검찰청별로 배치된 통역위원을 투입해 통역이 이뤄진다. 전문용어 설명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 통역인이 질문 내용을 조사받는 당사자에게 전하게 된다.

전국 검찰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사건도 많은 서울중앙지검에는 102명의 통역위원이 위촉돼 있다. 이 중 29명이 영어 통역위원이다.

존 리 옥시 전 대표 검찰 소환
존 리 옥시 전 대표 검찰 소환

(서울=연합뉴스) 신준희 기자 =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의 최대 가해업체인 옥시레킷벤키저(옥시)의 존 리 전 대표가 23일 오후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조사받는 사람이 개별적으로 통역을 대동하는 예도 흔하다. 이럴 때에는 일단 검찰 측 통역위원이전담하는 게 원칙이다. 조사받는 사람 쪽에서 이견이 있거나 별도 요구사항이 있으면 조율해 조사를 계속 이어간다.

2개 국어로 진행돼 한 단계를 더 거치다 보니 소요 시간도 한국인 조사의 최소 1.5배는 걸린다는 게 검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외국과 우리나라의 법 체계가 달라 때로는 피조사자에게 어떤 상황인지 설명에 공을 들여야 할 경우도 생긴다.

2008년 '외환은행 헐값매각' 사건 당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의 존 그레이켄 회장을 조사했을 때에는 통역과 조서 열람 등에 시간이 많이 들어 검찰이 예상한 시간의 3∼5배가 소요되기도 했다.

2005년에는 국내 상장업체의 주가를 조작한 혐의로 검찰이 영국계 펀드 헤르메스의 리처드 버네이스 회장과 토니 왓슨 최고경영자 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장시간 '진땀 나는 신경전'을 벌였다.

조서는 통역된 한국어로 작성된다. 조서는 재판 과정에서 중요 자료가 되기 때문에 열람시간도 많이 걸린다.

수사 내내 등장하는 각종 전문용어, 과학적 지식도 이번 수사의 관건이 됐다.

업무상 과실치사·과실치상 등 범죄 혐의를 적용하려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사망이라는 걸 우선 과학적으로 입증해야 하는 난점이 있었다.

2008년 '외환은행 헐값매각' 사건 당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수사한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의 존 그레이켄 회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2008년 '외환은행 헐값매각' 사건 당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수사한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의 존 그레이켄 회장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이철희 형사2부장)은 피해와 인과관계에 대한 판단은 철저히 전문가들에게 맡겼다. 독성학, 임상의학, 영상의학, 병리학 등 각 분야 최고 전문가의 조언을 받았다.

초창기부터 수사팀은 전문가들을 수시로 찾아갔는데, 의사는 진료시간 외에 짬을 낼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각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서로 다른 부분 등은 별도로 논의해야 하다 보니 '시간과의 싸움'을 벌여야 했다.

의사들을 한꺼번에 소집하기가 어려워 모든 전문가가 한 자리에서 회의한 건 지난달 중순 한 차례였다. 검찰 관계자는 "식사도 거르고 쉴 새 없이 토론을 벌일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고 귀띔했다.

이렇게 3개월가량 인과관계 규명에 매달리면서 혐의 입증에 탄력이 붙었고, 전문지식과 씨름하는 사이 검사들도 어느덧 '준 전문가'가 됐다.

영어 필기체로 알아보기 어렵게 작성된 진료 차트도 수사팀 검사들이 '해독'이 가능할 정도가 됐다는 전언이다.

최근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를 운영한 사업주의 어린 자녀가 같은 제품을 쓰다 폐손상으로 숨을 거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수사팀이 기록 분석을 거쳐 파악해 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수사는 국제교류 증가 등에 따른 외국인·다국적 기업 수사 증가와 범죄의 전문화·첨단화 경향을 잘 보여주는 대표 사례라는 점에서 검찰이 어떤 성과를 낼지 주목된다.

song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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