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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창촌 탈바꿈> ②산업형 성매매 역사…1900년 일본인 거류지서 시작

송고시간2016-06-04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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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화국때 전성기, 2004년 성매매특별법 발효후 쇠락

(전국종합=연합뉴스) 밤마다 홍등을 밝혔던 도심 집창촌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까?

집창촌이 하나둘씩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지만 '성매매 근절' 가능성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성매매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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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집창촌의 역사

국내 '산업형 성매매'가 시작된 시기는 1900년 전후다. 조선시대까지는 철저한 밀매음 형태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인 집단 거류지에서 일본식 유곽(遊廓)이 형성되기 시작해 1900년대 부산에 집창촌이 생겼다.

일본강점기 성매매의 특징은 정부의 철저한 관리·감독을 받는 공창 형태였다.

일제는 1916년 '유곽업 창기 취체규칙'을 만들어 성매매를 공식화하고 창기들로부터 세금을 받았다. 국내 최초의 공창 제도다.

부산, 인천 등 개항지를 중심으로 생겨나던 성매매여성 집결지는 성병 예방, 풍기문란 예방을 위해 한 곳으로 집중된다.

유곽에서 시작된 집창촌은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1947년 공창제가 폐지되면서 발 빠르게 변모한다.

정부는 1961년 윤락행위 방지법을 제정했지만 집창촌을 묵인했다. 성매매를 목적으로 한 일본인들 기생관광이 외화벌이에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이후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향락 산업이 더욱 확산했다. 도시 뒷골목에는 속속 집창촌이 형성됐다.

1970년대 중반에는 티켓다방이 등장했고, 1980년 이후 제5공화국 시절에는 군사정권의 3S(Sports, Screen, Sex) 정책 중 하나로 성매매가 전성기를 맞았다.

특히 1988년 올림픽 개최와 규제 완화로 산업형 성매매와 음성적 매매춘이 등장해 홍등가는 더욱 번성했다.

집창촌의 확대는 포주의 학대와 대규모 화재 등 각종 문제를 초래했다.

집창촌은 2004년 성매매방지특별법 제정을 계기로 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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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집창촌의 유래

서울 청량리 588과 파주 용주골, 부산 완월동, 대구 자갈마당, 춘천 난초촌, 전주 선미촌 등 전국 곳곳의 집창촌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대부분이 역이나 터미널 근처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것으로 짐작하지만 지역마다 색깔이 조금씩 다르다.

서울의 대표적인 집창촌인 '청량리 588'.

이곳은 6·25전쟁 때 경원선 종점이었다. 당시에 강원도 철원·화천·양구 등 동부전선 격전지로 떠나는 군인들을 상대로 성매매가 이뤄졌다.

명칭은 전농동 588번지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588번 시내버스가 이곳을 지났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부산 서구 초장동과 충무동에 걸쳐 있는 완월동은 일제가 만든 최초의 계획된 집창촌이다.

일본강점기 이후에는 미군정에 의해 형식적으로 공창제가 폐지됐으나 항구를 낀 부산은 물자나 사람이 모여들었고 완월동에서는 성매매가 번창했다.

윤락행위 방지법이 시행됐지만 완월동은 사라지지 않았고 1980년대 전성기를 누렸다.

여성인권단체 '살림'의 기록을 보면 1979년 당시 완월동에는 124개의 성매매 업소가 있었다.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생기면서 쇠락의 길을 걷던 완월동은 암암리에 영업을 해왔고 현재는 영업규모가 크게 줄어 50여개 업소에 250여명의 여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6·25전쟁 때 미군기지가 들어서며 생겨난 경기도 파주시 용주골은 한때 2만여㎡에 성매매업소가 200여 곳, 종사자가 500∼600명에 달했다.

2000년대 들어 미군기지가 이전한 데다 2004년 말 성매매방지특별법이 시행되자 업소와 종사자 수가 크게 줄었다. 지금은 80여 업소가 180여 명의 종사자를 두고 영업하고 있다.

인천시 남구 숭의동 360번지 일대에 형성된 '옐로하우스'는 인천의 집창촌이다.

인천 개항 후 1902년 현재 인천 중구 신흥동 신흥시장 일대에 들어선 일본 유곽으로 시작했다. 1961년 군사정부의 사회정화 방침에 따라 현재 위치로 이전됐다.

옐로하우스는 2008년 도시 환경정비 구역으로 지정돼 철거사업이 추진되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재 경기 침체로 재개발 사업은 진척이 없는 상태다.

1950년대 당시 전주역(현 전주시청) 주변에 들어선 전북 전주시 선미촌은 한때 400명이 넘는 여성이 있었지만 이곳 역시 성매매방지특별법 발효 이후 종사자가 100명 밑으로 급감했다.

강원 춘천시 난초촌은 해방 후 미군기지가 들어선 이후 조성됐다. 2006년 재개발로 문을 닫은 장미촌과 함께 성업을 이뤘다.

2004년 성매매특별법 시행과 2005년 10월 경춘선 무궁화 열차의 종착역이던 옛 춘천역이 폐쇄된 데 이어 미군기지까지 문을 닫자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이들 집창촌의 시작은 달랐으나 공통으로 '성매매방지특별법'이란 직격탄을 맞고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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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곡진 인생 스토리…문학작품과 영화의 배경

집창촌은 각종 문학작품과 영화의 배경으로 주목받았다.

1973년 소설가 조선작이 발표한 '영자의 전성시대'는 성매매 여상을 다뤘다. 부잣집에서 식모로 일하던 시골 아가씨 영자는 주인집 아들에게 성폭행당한 뒤 집을 뛰쳐나와 버스 안내양으로 일하다 한쪽 팔을 잃고 성매매여성으로 전락한다.

이 소설은 2년 뒤 영화로도 제작돼 히트했다.

소설은 당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상경했던 젊은 여성들의 잔혹한 삶을 그려 충격을 던졌다.

임권택 감독은 '티켓(1986)'과 '노는 계집 창(1997)'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삶을 필름에 담았다.

김기덕 감독도 영화 '나쁜 남자(2001)'에서 성매매를 다뤘다.

집창촌 폭력배인 남자 주인공은 우연히 만난 여대생에게 모욕을 당하자 복수심으로 그녀를 성매매여성으로 타락시킨다.

그는 한 면은 거울, 다른 한 면은 유리인 벽을 통해 그녀를 지켜본다.

청량리 588은 소설가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과 이동철의 '꼬방동네 사람들'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 참고문헌 : 홍성철 '유곽의 역사'

(이재현 노승혁 김선호 이덕기 윤태현 김동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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