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 걸고 스킨십…공들인 경찰, 불안증세 '축사노예' 말문 열어
송고시간2016-07-20 09:21
극도 불안감·대인기피증으로 조사 어렵자 매일 방문해 친분 쌓아
"심리적 안정이 중요…서두르지 않고 피해자 상태 배려해 조사"
(청주=연합뉴스) 김형우 기자 = "손으로 맞장구도 치고 하루에 한 번씩 집을 방문해 안면을 익히면서 피해자와 심리적 거리감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청주시 오창읍 한 축사에서 19년간 강제노역에 시달린 지적장애인 '만득이' 고모(47)씨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어느 사건보다 피해자 고씨 수사에 공을 들이고 있다.
지적 장애 2급 판정을 받은 고씨는 지적능력이 초등생 이하 수준이어서 의사결정이나 표현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학습이나 대인관계, 일상생활, 경제활동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반인과는 확연히 다른 어려움을 겪는다.
게다가 19년동안 시골 외진 곳에서 외부인들과 거의 격리되다시피 한 채 강압적인 노동에 시달렸던 터라 심리적 장애 증세도 엿보인다.
실제 경찰이 처음 마을 인근에서 고씨를 발견했을 당시 그의 심리상태는 몹시 불안정했다.
상대방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눈치를 보고, 간단한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채 횡설수설했다.
이번 사건과 관련 일관되고 명확한 피해자 진술 확보가 우선인 경찰로서는 당혹스러운 상황에 놓인 것이다.
고씨의 피해자 진술을 토대로 가해자인 농장주 김모(68)씨 부부를 소환 조사해야 하는 수사일정에도 차질이 생겼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경찰의 피해자 조사는 일반 수사와는 달라야 했다.
경찰은 불안증세와 대인기피증을 보이는 고씨의 진술 확보를 위해서는 심리적 안정을 취하게 하고, 수사관과 돈독한 신뢰관계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수사팀은 지난 14일 가족 품에 안긴 고씨의 집에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방문해 얼굴을 익혔다. 안부를 묻거나 일상생활과 관련해 가벼운 대화만 나누고, 축사 생활 등 고씨가 언급을 꺼리는 질문은 되도록 피했다.
날씨나 계절, 고씨가 평소 좋아하는 것 등을 놓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면서 그의 경계심을 풀었다.
고씨가 즐기는 음식도 건네고, 하이파이브하며 장난을 걸면서 심리적 거리감을 좁혀나갔다. 낯선 이들에게 극도의 경계감을 보였던 고씨는 경찰의 이런 노력 덕에 불과 며칠 만에 심리 상태가 급속도로 호전됐다.
경찰은 2차 조사를 하면서 고씨의 심리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날 오전 9시부터 3시간가량 진행된 조사 장소를 경찰서가 아닌 고씨의 집으로 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일반인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상황이 장애인에게는 위협이나 불안감을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고씨를 상대로 한 질문도 신중하게 했다.
"축사에서 일할 때는 소똥을 치웠나요?", "밥은 잘 먹었어요?", "때리기도 했었나요?", "어디를 때렸어요?" 등 되도록 고씨가 위압감을 받지 않도록 딱딱한 말투 보다는 부드러운 경어체 말투를 사용했다.
경찰 관계자는 "오랫동안 격리된 채 자존감을 상실한 피해자가 겁을 먹을 수 있어 추궁당하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말했다.
고씨가 수사관들과 있는 자리를 불편해할 수 있다고 판단, 조사에 친인척이나 사회복지사, 전문가를 동석시켰다.
경찰 관계자는 "고씨가 명확하게 자신이 겪은 피해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며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않고 고씨가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의 노력은 효과를 보였다. 처음 경찰을 보고 달아나고, 지난 15일 1차 조사에서 '네''아니오' 수준의 대답만 했던 고씨는 나흘 만인 지난 19일 이뤄진 2차 조사에서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비록 짧은 문장이긴 하지만 스스로 입을 열어 피해 상황을 밝혔고, 자신의 의사를 분명한 어조로 전했다.
고씨가 구체적인 피해 진술을 하지 못할 경우 가해자의 혐의 입증이 어려울 수 있다고 우려했던 경찰은 고씨의 상태 호전에 안도했다.
고씨 몸 곳곳에 난 상처가 가혹행위에 의한 것인지 가리기 위해 20일 의료기관 정밀 검진에 나서는 경찰은 조만간 김씨 부부를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 조사한 뒤 입건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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