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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절대 다시는 안돼" 인민군 간부가 회고한 '정전협정'

송고시간2016-07-27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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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대장 출신 양원진씨…"오전 10시 거짓말처럼 양측 포격 중단"

"핵전쟁 일어난다면 우리는 공멸할 수밖에 없다"

'정전협정' 회고하는 양원진씨
'정전협정' 회고하는 양원진씨

(서울=연합뉴스) 설승은 기자 = 서울 서초구 한국전쟁유족회 사무실에서 만난 백발의 양원진(87)씨. 양씨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으로 참전해 전장을 돌았다. 2016.7.27
ses@yna.co.kr

(서울=연합뉴스) 설승은 기자 = "송장 썩은 물이 강처럼 흘렀죠. 한국전쟁 때 그 귀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갔는데…. 전쟁은 절대로 사람이 할 일이 아닙니다. 후손들의 역사에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27일 서울 서초구 한국전쟁유족회 사무실에서 만난 백발의 양원진(87)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63년 전 정전협정 당시 상황을 회고하면서 평화론을 설파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전장에서 스러져간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잠시 지었다가 이내 미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절대 다시는 안돼" 인민군 간부가 회고한 '정전협정' - 2

1929년 전남 무안에서 주조회사 사장 아들로 태어난 양씨는 경희대 전신인 신흥대학에 다니다 전쟁을 맞았다.

21세 청년이던 양씨는 전쟁이 터진 6월 25일 서울 노량진에서 친구를 만나 고향에 같이 내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친구와 길이 엇갈린 탓에 이틀 뒤 마음을 바꿔 학교로 돌아가려다가 용산 인근 철로 터널에 몸을 숨겼다.

다음날 동트기도 전인 오전 2시30분, 눈앞에서 굉음과 함께 불빛이 번쩍이더니 먼지 폭풍이 일었다. 한강 인도교와 철교가 폭파되는 순간이었다.

양씨는 학교로 돌아갔다가 같은 해 7월 초 인민군에 입대했다. 당시 사회주의에 관심이 컸기 때문에 국군이 아닌 인민군에 입대했다.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 1세대로 꼽히는 최현이 이끌던 부대에도 몸담았다고 했다.

전쟁 첫해 9월에는 온양 전투에 나섰다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중대원이 몰사했다고 했다. 그 바람에 홀로 걸어서 차령산맥과 설악산을 통해 강원도 인제 북쪽에 있는 인민군 부대에 합류하기도 했다.

양씨는 "포탄 파편에 맞아 피가 솟구치는 부상, 설익은 옥수수 2개로 하루를 버틴 일, 사랑하는 전우들이 전사하던 때가 생생하다"며 "이렇게 고생할 바에야 차라리 죽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회상했다.

숱하게 죽어 나가는 전우들을 보면 적개심이 타오르다가도, 막상 국군을 포로로 잡으면 늘 그들을 꼭 안아줬다고 한다. 적이 아니라 동족이었기 때문이다.

"포로들은 잡히면 죽음에 대한 공포로 몸을 벌벌 떨어요. 그들을 안아주고 등 두드리며 '포로수용소에서 지낼 테니 걱정 말라'고 했죠. 만약 상대를 많이 죽였으면 지금도 잔상이 눈에 어른거려 못 살았을 텐데 그건 참 잘한 일 같아요."

3년이 흘러 전쟁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양씨는 63년 전인 1953년 7월 27일, 전쟁이 멈추던 그 날을 떠올리다 고개를 저으며 도리질했다.

"휴전일요? 전쟁은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오지 않을 것 같은 날이 온 날이었어요."

부소대장으로 강원도 인제에서 전투하던 양씨는 휴전 전날 무전기로 당시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명령을 전해 들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참호로 판 굴속에서 무전을 통해 김일성 최고사령관의 명령을 받아 적으라고 하더라고요. 몇 시간 후 정전협정을 하는데 도장을 찍게 되고, 27일 오전 10시에 전쟁이 중단된다면서요."

양씨는 "정전을 위한 담판이 전쟁 발발 이듬해인 51년 7월에 시작됐는데 2년이 다 되도록 전쟁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면서 "이 전쟁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고 회고했다.

정전 당일인 27일에도 강원도 최전선에서 국군·유엔군과 인민군 간 전투는 계속됐다고 양씨는 말했다.

당시 보급 물자가 부족했던 인민군은 총알을 아끼려고 포격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그날은 남은 총탄을 마구 쏟아냈다.

양씨의 손목시계가 오전 10시를 가리키자 거짓말처럼 양측의 포격은 멈췄다. 고요와 침묵. 죽지 않고 살아있음에 대한 안도. 바로 휴전이었다.

휴전 이후 양씨는 평안남도 대동군에 있는 정치군관학교에 들어갔다가 대남 공작원으로 활동했다.1959년 남파돼 서울에 왔고, 4·19혁명 직후인 이듬해 5월 결혼해 신혼여행을 하고 오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체포됐다.

양씨는 수감 6년 뒤인 1966년 전향하고도 더 수감생활을 했다. 약 30년 수감생활을 마치고 1988년 성탄절 특사로 출소, 질곡 어린 삶에서 벗어나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휴전 이후에도 60년이 넘도록 이어지는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통일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양씨는 "지금 남북 분위기는 통일과 반대되는 분위기"라면서 "양측이 왕래하고 교류하고,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쌓아나가는 게 가장 중요하지만 우리는 의심하고 헐뜯고 소통하지 않아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남북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과 관련해서는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면서 "특히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공멸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있죠. 가족이 오순도순 지내야 만사가 행복하잖아요. 남과 북도 똑같아요. 서로를 향해 겨눈 총구를 내려놓고 오순도순 지내는 날, 민족 모두 행복하고 평화로울 날. 바로 전쟁이 끝나는 날이 어서 오면 좋겠습니다."

se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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