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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학살93년>"日정부 학살 은폐했다…관련 자료 공개해야"(종합)

송고시간2016-09-01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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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대지진 혼란 때 유언비어 믿고 학살 묵인한 듯"

"학살은 실제 벌어진 일, 혐한 선동의 심각성 깨달아야"

간토학살 증언 엮은 니시자키 씨…도서관 일기 코너서 수백 권 뒤져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재일 조선인을 모두 죽이자고 혐한시위를 하는 이들이 있는데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예전에 그런 일이 일본에서 실제로 벌어졌다."

간토(關東)대지진 후 벌어진 조선인 학살 사건에 관한 증언 1천100개를 모아 책으로 엮은 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57) 일반사단법인 호센카(봉선화) 이사는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특정 집단에 대한 공개적 차별·혐오 발언)가 심각한 문제인 이유를 간토대학살이라는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등 유언비어가 퍼지고 조선인을 내쫓자는 주장이 대두한 가운데 실제로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는 점을 되새겨본다면 재일 한국·조선인을 향해 '돌아가라'고 하거나 '죽이겠다'는 등 혐한시위를 하는 것을 단순히 거친 발언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간토학살 연구에 헌신한 니시자키
간토학살 연구에 헌신한 니시자키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57) 일반사단법인 호센카(봉선화) 이사가 1일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이 열린 일본 도쿄도 요코아미초(橫網町) 공원에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증언집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기록'이 1일 발행된 것을 계기로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 응한 니시자키 이사는 학살은 "전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며 헤이트 스피치를 당하는 재일 한국·조선인은 자신이나 자식·손자가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구체적으로 느낀다고 분석했다.

그는 "간토대지진 때의 학살이 그리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증언집이 필요하다"며 학살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것을 알면 (헤이트 스피치를 대하는) 생각이 바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니시자키 이사는 간토대지진 당시 "많은 일반인은 유언비어를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학살을 묵인한 것 같다"며 당시는 라디오도 없던 시절이고 지진으로 생긴 화재 때문에 신문사가 불타는 등 정보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견해를 밝혔다.

간토대학살 93년이 지나며 이를 목격한 생존자가 거의 없는 탓에 증언집에 실린 내용은 대부분 기존에 출간된 자료를 인용하는 형식을 취했다.

여기저기 흩어진 증언을 한 권으로 집대성했기 때문에 일반인이나 관련 연구자가 학살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간토대지진시 학살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해 위령하는 모임'이 조선인 희생자의 유골을 찾기 위해 1982년 9월 아라카와 하천 부지에서 발굴을 시도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기록'에 실려 있다.[연합뉴스 자료사진]

'간토대지진시 학살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해 위령하는 모임'이 조선인 희생자의 유골을 찾기 위해 1982년 9월 아라카와 하천 부지에서 발굴을 시도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기록'에 실려 있다.[연합뉴스 자료사진]

니시자키 이사는 증언을 찾아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그는 "도서관의 일기 코너에 있는 수백 권을 모두 살펴보고 증언을 찾는다"며 "간혹 간토대지진에 관해 쓴 일기가 있으면 수십 권 중에 한 권 정도는 조선인 학살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실려 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니시자키 이사는 6년에 걸쳐 일기, 기사, 자서전, 가족사 서적 등에 수록된 증언을 수집했으며 이를 정리해 책으로 펴내는 데 추가로 약 1년 반의 시간을 추가로 들였다.

그는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을 위해서는 "경찰이나 군대 등 일본 정부의 자료가 필요하지만, 전혀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자신이 민간인의 목격 정보에 천착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니시자키 이사는 "당시 (일본) 정부는 (한국을) 식민지 지배하고 있어서 학살 사건이 밝혀지는 것은 매우 곤란했다. 그래서 사건을 은폐했다"며 학살의 심각성을 고려하면 "일본 정부와 공공 기관이 어딘가에 자료를 보관하고 있을 것이며 이를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메이지(明治)대 재학 중에 '간토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해 위령하는 모임'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간토대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에 전력을 쏟고 있다.

또 2009년 9월 도쿄도(東京都) 스미다(墨田)구를 흐르는 하천 아라카와(荒川)의 제방 아래쪽에 '관동대지진시 한국·조선인 순난자 추도의 비'를 건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들을 위한 '관동대지진시 한국·조선인 순난자 추도의 비'. 당시 일본 군대가 기관총 등으로 조선인들을 학살한 현장인 도쿄 스미다(墨田)구 아라카와(荒川) 제방 옆 주택가에 세워져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학살당한 조선인들을 위한 '관동대지진시 한국·조선인 순난자 추도의 비'. 당시 일본 군대가 기관총 등으로 조선인들을 학살한 현장인 도쿄 스미다(墨田)구 아라카와(荒川) 제방 옆 주택가에 세워져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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