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연합뉴스 최신기사
뉴스 검색어 입력 양식

"젖먹이 두고 바다로" 고된 삶 견뎌낸 강인한 제주해녀

송고시간2016-12-01 00:41

이 뉴스 공유하기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본문 글자 크기 조정

일제 총칼 앞 항일운동도…오늘날 '일·가정 양립' 모델로 주목

(제주=연합뉴스) 전지혜 기자 = 고운 소녀 시절부터 주름진 할머니가 될 때까지 물질을 멈추지 않은 제주해녀들은 바다 안팎에서 쉴 틈 없이 일하며 생계를 책임지고 집안일에 밭일까지 하는 고된 삶을 살아왔다.

해녀의 강인함이 제주의 아들딸을 키워냈고, 경제를 이끌어가며 오늘날의 제주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여성사'(제주발전연구원), '통사로 살피는 제주해녀', 해녀박물관 자료 등을 바탕으로 고된 제주해녀의 삶을 되돌아보고 오늘날 일·가정 양립의 모델로서 시사점을 짚어본다.

해산물 채취하는 해녀
해산물 채취하는 해녀

(서귀포=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 어촌계 해녀가 쇠소깍 앞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고 있다. 2016.11.30
jihopark@yna.co.kr

◇ "출산 후 몸조리도 못 하고 바다로"…밭일·집안일도 병행

"임신해서 배가 불러와도, 아기 낳은 뒤 몸조리도 못한 채 젖먹이 떼놓고도 물질 나갔지."

해녀 일은 과거 제주인의 고된 역할을 일컫는 육고역(六苦役)에 포함될 정도로 힘든 일로 꼽혀왔다.

지금 50대가 넘은 해녀 중에는 10대 때부터 물질했다는 사람이 많다. 고왔던 소녀의 손은 차가운 바닷속에서 거친 돌 틈을 헤집느라 거칠어지고, 상처투성이가 됐다.

해녀들은 제주는 물론 다른 지역, 멀게는 중국·일본·러시아까지 가서 물질하며 온갖 고초를 겪었다. 이렇게 번 돈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지금의 제주를 일궈냈다.

소라 채취하는 해녀
소라 채취하는 해녀

(서귀포=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지난 25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 어촌계 해녀가 쇠소깍 앞바다에서 소라 등을 채취하고 있다. 2016.11.30
jihopark@yna.co.kr

고된 삶은 속담에도 오롯이 담겨있다.

'해녀는 출산 후 사흘이면 아기를 삼태기에 눕혀두고 물질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출산 후 짧게는 삼칠일(21일), 길게는 석 달여간 몸조리를 제대로 해야 몸이 회복되지만 자신의 몸을 돌볼 새도 없이 눈에 밟히는 젖먹이를 뒤로하고 다시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져야 했던 서글픈 삶이 담겨있는 말이다.

물질의 고됨과 위험함을 저승에 빗댄 '저승에서 벌어 이승에서 쓴다'는 말도 있다.

'여자로 태어나느니 소로 태어나지'라는 속담에는 우직한 일꾼의 상징인 소보다도 고된 제주 여성의 신세를 한탄하는 뜻이 담겼다.

물질하지 않는 날에도 손을 놀리지 않았다. 뭍에서는 밭농사 일을 하는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삶을 살았고, 집안일과 육아도 멈출 수 없었다.

제주해녀항일운동 84주년을 맞은 올해 1월 12일 제주시 동녘도서관에서 열린 제주해녀항일운동 기념식[연합뉴스 자료사진]

제주해녀항일운동 84주년을 맞은 올해 1월 12일 제주시 동녘도서관에서 열린 제주해녀항일운동 기념식[연합뉴스 자료사진]

◇ "수산물 수탈 안돼" 항일운동…'독도 지킴이' 역할도

제주시 구좌읍 해녀박물관 남쪽에는 해녀항일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이 일대는 1932년 일제의 수산물 수탈에 맞선 해녀 항일운동 집결지였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1931∼1932년 구좌, 우도, 성산 등 제주도 동부지역 해녀 1만7천여명이 238회의 시위를 벌여 일제의 식민지 경제수탈 정책에 항거한 국내 최대 여성 항일운동으로 꼽힌다.

조선 시대에는 해산물이 진상품으로 바쳐졌지만 1900년대 들어 일본 무역상들이 등장하며 해산물의 가치가 상승, 해녀 일이 제주경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이런 와중에 일본 어부들이 잠수부를 동원해 해산물을 남획하는 바람에 제주 연안 어장이 황폐해졌다.

결국 해녀들은 다른 지방으로 이동해 '출가 물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익은 더 났지만, 타향살이해야 하는 데다가 해당 지역 어민들에게 대가를 지급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출가 해녀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설립됐으나, 일제 치하에서 되려 각종 수수료와 수당을 수탈하는 조직으로 변질했다.

제주 해녀 항일운동 기념탑
제주 해녀 항일운동 기념탑

(제주=연합뉴스) 1931∼1932년 현 제주시 구좌읍과 우도면, 서귀포시 성산읍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해녀 항일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제주해녀박물관 앞동산에 세운 기념탑. 2016.11.30
khc@yna.co.kr

불만이 커지던 와중에 1930년대 들어 성산포 해초 부정판매 사건과 하도리 감태·생복(날전복) 가격 조작사건 등이 잇따라 발생, 반발이 커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시위는 1932년 1월 12일 장날을 맞은 세화장에서 열렸다. 해녀 수백명이 당시 제주도사 겸 제주도해녀어업조합장이 순시 오기를 기다렸다가 호미와 빗창을 들고 달려들었고, 도사는 결국 굴복해 닷새 안에 해녀들의 요구조건을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답이 오지 않자 민심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후 경찰이 시위 관련자를 체포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해녀들과 충돌했지만 해녀들은 발포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대항했다.

경찰은 무장경관대를 편성해 주동자 검거에 나섰고, 해녀 다수가 검거됐다가 하도리의 부춘화·부덕량·김옥련 등 3명을 제외하고 모두 석방됐다.

해녀항일운동은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다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외면받다가 2003년에 부춘화·김옥련 해녀, 2005년에 부덕량 해녀가 각각 건국포장을 받는 등 현재까지 해녀항일운동 관련 11명이 국가유공자로 선정됐다.

제주해녀 김공자(73)씨가 과거 독도에서 생활했을 당시 경찰경비대가 찍어준 자신의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연합뉴스 자료사진]

제주해녀 김공자(73)씨가 과거 독도에서 생활했을 당시 경찰경비대가 찍어준 자신의 사진을 들어 보이고 있다.[연합뉴스 자료사진]

'출가 해녀' 가운데 일부는 수십년간 울릉도·독도 바다를 누비며 해산물을 채취, 독도 땅에 대한 우리나라의 실효적 지배 면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독도의용수비대 활동을 도와주기도 했다.

독도에서 10여년간 물질한 해녀 김공자씨는 2013년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독도경비대가 있던 동도에 물이 모자라 우리가 지내던 서도에서 식수를 전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 해녀들이 독도의용수비대 막사를 지을 통나무를 뭍으로 밀어주기도 했고, 독도경비대원 부식을 실은 경비정이 높은 파도에 접안하지 못하자 헤엄쳐 보급품을 나른 해녀도 있었다고 한다.

지난 8월 24일 서귀포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16회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 특별세션 '바다의 딸, 21세기를 살아낸 제주 해녀'[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 8월 24일 서귀포시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16회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 특별세션 '바다의 딸, 21세기를 살아낸 제주 해녀'[연합뉴스 자료사진]

◇ 오늘날 '일·가정 양립' 모델로 꼽혀

"물질 솜씨가 있어서 돈을 많이 벌어 집도 짓고,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우고 결혼도 시키고. 50여년간 참 보람 있었어"(홍경자 해녀)

지난 8월 제주에서는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KOWIN) 행사가 열렸다. 세계 각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인 여성 리더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특별세션으로 연극 '오래된 미래, 제주해녀'가 무대에 올랐다.

현직 해녀들과 제주사대부고 해녀동아리, 한수풀해녀학교 졸업생 등이 출연해 수십 년간 바다와 육지를 누비며 가족 생계와 집안일을 책임져온 강인하지만 고달팠던 해녀의 삶을 연극으로 그려냈다.

연극을 본 여성 리더들은 저마다 일과 가정 둘 다 지켜내느라 고단했던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감동하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몸 녹이는 해녀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해녀들이 물질을 가기 전 불턱에 모여앉아 몸을 녹이고 있다. 2016.11.30 [제주특별자치도 해녀박물관 제공=연합뉴스] jihopark@yna.co.kr

몸 녹이는 해녀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해녀들이 물질을 가기 전 불턱에 모여앉아 몸을 녹이고 있다. 2016.11.30 [제주특별자치도 해녀박물관 제공=연합뉴스] jihopark@yna.co.kr

해녀들은 생계를 위해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잡아온 소라와 전복이 곧 생활비이자 자녀들의 학비가 됐다.

물질을 마치고 돌아오면 두고 갔던 아이를 돌보고 밀린 집안일까지 하느라 허리를 바닥에 붙일 시간이 없었다.

해녀들은 작업이 워낙 힘든 데다가 물질을 천한 일로 보는 시선에 물질을 그만두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인제야 비로소 가치가 널리 인정받으며 전문직업 여성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일한다고 한다.

해녀 김복희(55)씨는 "바다가 곧 우리의 직장"이라며 "직장생활보다 훨씬 편한 면이 있다. 물질은 남 눈치 보지 않고 자기가 능력껏 벌 수 있지 않느냐"며 물질 일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처럼 바다에서도, 땅에서도 쉬지 않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제주해녀의 삶은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가는 이 시대의 여성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atoz@yna.co.kr

댓글쓰기
에디터스 픽Editor's Picks

영상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