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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역사 2cm] 미·영·일 한반도 식민지 밀약 때 고종은 굿판 벌였다

송고시간2017-04-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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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한국 외교력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미국이 한국과 일본을 대하는 일련의 태도에서 감지되는 온도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집권 후 첫 정상회담 상대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택했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최근 동해를 일본해로 표현했다.

북한군 창건일을 앞두고 미국이 일본 등과 대비책을 논의할 때는 한국을 뺐다.

대한민국 외교당국의 전략 부재와 무관심, 무능이 어우러진 결과로 보인다.

일본이 20세기 초 한반도를 강점하기 직전 상황과 여러모로 닮았다.

영국과 미국이 일제 침탈을 묵인하는 협상을 벌일 때 대한제국은 외톨이였다.

고종(1852~1919)이 1873년 아버지 대원군을 밀어내고 정치 전면에 등장할 때만 해도 국제정세를 꿰뚫는 혜안을 갖춘 듯했다.

세계열강에 나라 빗장을 걸어 잠근 대원군과 달리 개방 행보를 보였다.

강대국들을 주권 수호에도 활용했다.

프랑스 한 신문에서 삽화를 통해 러일전쟁 초기 뤼순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 장면을 그려냈다.

프랑스 한 신문에서 삽화를 통해 러일전쟁 초기 뤼순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 장면을 그려냈다.

청·러·미·영 등 열강이 서로 견제하면 세력균형을 이뤄 국토를 지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오랑캐를 오랑캐로 다스린다는 '이이제이' 전략은 초기에 맞아떨어진다.

미국을 청나라 대항마로 삼으려다 실패하자 곧바로 러시아를 끌어들인다.

영국과 일본, 청나라 등 3개국이 러시아와 대립각을 세우던 상황을 역이용한 묘수였다.

세력균형 전략은 한동안 약발이 받았으나 나중에는 악수가 되고 만다.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 지배권을 놓고 1894년 한반도 곳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조선과 동맹국이 되겠다던 러시아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침묵했다.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러시아를 끌어들인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고종은 신변위협을 느낀 나머지 궁궐을 탈출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다.

당시 러시아는 고종 부탁을 받아들여 조선을 러시아 보호령으로 삼기로 한다.

양국 연합군을 창설하는 방안도 논의했다.

러시아를 방패 삼아 일본 침략을 막아보자는 계산에서다.

이런 구상은 실패로 끝난다.

러시아는 중국 랴오둥반도 항구를 확보한 뒤 태도가 돌변했다.

조선 보호령 등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태평양 부동항을 이미 챙긴 마당에 한반도에서 전쟁 위험을 감수할 필요성이 사라진 탓이다.

일본은 러시아 의중을 간파하고서 조선 점령을 인정받는 협정을 서둘러 체결한다.

한반도는 러·일 세력균형이 깨지고 일본 독무대가 된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은 듯 일본은 영국과 미국 손을 잡는 치밀함도 보인다.

1902년 영일동맹을 맺어 일본의 한반도 특수 권익을 인정받았다.

당시 세계 최강국 영국을 동맹국으로 삼은 일본은 위험한 도박을 벌여 성공한다.

러일전쟁(1904~1905)을 감행해 승리한 것이다.

러시아를 한반도에서 완전히 내쫓은 일본은 안전판을 추가로 마련한다.

1905년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보장하는 2차 영일동맹을 맺는다.

일본은 반대급부로 영국의 인도 지배를 승인한다.

제국주의 열강이 합세해 약소국을 나눠 먹기로 약속한 것이다.

[숨은 역사 2cm] 미·영·일 한반도 식민지 밀약 때 고종은 굿판 벌였다 - 2

일본과 미국이 체결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한반도 강탈을 위한 화룡점정이었다.

양국이 각각 한국과 필리핀 지배를 교차 승인한 것이다.

고종이 끌어들인 러시아는 일본에 밀려나고 미국은 뒤통수를 쳤다는 점에서 이이제이 전략은 실패한 것이다.

자체 역량은 키우지 않은 채 외세를 어설프게 이용하려다 파국을 맞는다.

고종은 1905년에 가서야 국권 침탈 위기를 인지한다.

일본이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 외교권과 통치권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뒤늦게 다양한 외교노력을 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조약 반대 친서를 미국인 헐버트(1863~1949) 박사에게 보내 외교전을 펴도록 했으나 미국 대통령은커녕 국무장관도 만나지 못한다.

1907년에는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다.

강대국을 상대로 을사늑약 불법성을 폭로하고 주권 회복을 호소하기 위해서다.

외교권을 박탈당한 터라 회의 발언권은 물론 참석조차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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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강대국과 손잡고 침략 야욕을 키울 때 고종은 미신에 빠져 있었다.

고종이 거처한 덕수궁과 경운궁에는 점쟁이와 무당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무속인을 가까이 한 것은 명성황후 때문이다.

명성황후가 무당 신령군을 궁궐로 데려와 가까이 지낸 탓에 무속신앙을 자연스레 믿게 된다.

서울 동소문 부근에 중국 관우 장군 사당도 세운다. 관우 딸을 자처한 신령군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사당이 완공됐을 때 고종은 문무백관과 왕세자를 데려가 함께 참배했다.

신령군은 금강산 정기를 한양으로 가져와야 나라가 태평해진다며 초대형 굿판도 벌인다.

금강산 1만2천 봉우리마다 쌀 1석과 돈 10냥을 바치게 한 탓에 국고를 크게 축냈다.

신령군은 고종 부부를 등에 업고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주변에는 권세가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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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서 돈을 뜯고 장·차관 등 인사에 개입한 최순실을 연상케 한다.

명성황후는 풍수지리에도 집착했다.

28년 동안 친정아버지 무덤을 무려 4차례나 옮겼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죽고 나서도 미신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러일전쟁 당시 전세가 일본으로 기울어졌는데도 굿판을 벌여 러시아 승리를 기원한다.

무당 주문을 받아 궁궐 기둥 밑에 큰 솥을 묻기도 했다.

고종 최측근 인사로 활동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당시 상황을 기록했다.

"고종과 엄비는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이는 등 미신을 신봉했다. 열강의 국제관계와 일본 속셈은 이해하지 못했다"

엄비는 명성황후 시해 후 고종 총애를 받아 영친왕 이은을 낳은 후궁이다.

대한제국은 외교·군사 역량을 높이는 대신에 외세 끌어들이기로 일관하고 미신으로 국고를 탕진했다는 점에서 망하는 조건을 다 갖춘 셈이다.

북한 핵실험을 계기로 한반도 안보위기가 높아졌는데도 외교력은 구한말 수준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북핵 해법에 주변 강대국 의중만 반영할 뿐 정작 한국은 소외됐다는 '코리아 패싱'이라는 용어까지 나돌 정도다.

강대국 이해관계에 따라 한반도 운명이 결정되는 위험을 막으려면 고종 외교전략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러시아와 미국, 영국, 청나라 등을 넘나들며 현란한 협상력을 발휘한 일본은 밉지만, 외교술은 배워야 한다.

"미국에는 영원한 친구도 적도 없다"는 미국 외교 전설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발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had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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