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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그림엽서 속 조선신궁과 가마꾼…"식민지 조선 실상 왜곡"

송고시간2017-08-0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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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석 해양대 강사, 일제강점기 조선신궁 엽서 300여장 분석

조선신궁과 가마꾼 엽서. [해외신사적지 데이터베이스 캡처]

조선신궁과 가마꾼 엽서. [해외신사적지 데이터베이스 캡처]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일본 신사(神社)를 묘사한 풍경화가 인쇄된 일제강점기 그림엽서 한 장이 있다. 신사에 설치되는 문인 도리이(鳥居)가 늘어서 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일제가 건설한 경성의 '조선신궁'(朝鮮神宮).

그런데 엽서 좌측 하단에는 가마를 들고 걸어가는 사람을 그린 작은 흑백 그림이 있다. 옷차림을 보면 영락없는 조선인이다. 초라한 가마꾼은 일제 문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신궁과 대비를 이룬다.

일제강점기 조선신궁 그림엽서에는 가마꾼뿐만 아니라 조선의 기생, 여인, 장승이 등장하기도 한다. 엽서의 이미지를 통해 조선에는 전근대 혹은 약자라는 이미지가 투영되고, 일본은 근대적 존재 또는 강자가 됐다.

도리이가 부각된 조선신궁 엽서. [신동규 동아대 교수 제공]

도리이가 부각된 조선신궁 엽서. [신동규 동아대 교수 제공]

동아시아 근대사를 전공한 한현석 한국해양대 강사는 동아시아일본학회가 내는 학술지 '일본문화연구'에 게재한 논문 '사진그림엽서로 본 식민지 조선에서의 국가신도 체제 선전과 실상'에서 조선신궁이 들어간 엽서 300여 장을 분석했다.

조선총독부가 조선인과 일본인을 모두 포섭하기 위해 1925년 세운 조선신궁은 서울 남산에 있었다. 1930년에는 38만6천여 명이 다녀갔고, 1942년에는 264만8천여 명이 참배했다고 전한다.

일제는 조선을 교화하는 건축물로 조선신궁을 건립했으나, 조선인들은 이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일제는 1930년대부터 신사 참배를 강제하는 황국 식민화 정책을 펼치는 한편 각종 매체를 이용한 선전 활동을 이어갔다.

한 강사는 "조선신궁은 일제를 상징하는 건물이기도 했지만, 조선인을 신체적·정신적으로 지배하고 규제하는 기관의 역할도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조선신궁 엽서는 1930년대 만들어졌을 것"이라며 "그림엽서는 대량생산과 유통이 가능해 일본의 고유한 신앙인 신도(神道)를 뒷받침할 내용을 알리는 데 적합했다"고 덧붙였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구도의 조선신궁 엽서. [신동규 동아대 엽서]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구도의 조선신궁 엽서. [신동규 동아대 엽서]

그는 조선신궁 엽서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 조선신궁과 대비되는 조선 이미지의 조합 ▲ 도리이 강조 ▲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듯한 구도 ▲ 벚꽃 ▲ 엄숙함을 강조하는 설명글 등 5가지를 뽑았다.

도리이에 대해 한 강사는 "제국 일본을 연상시키는 기호의 의미를 갖게 됐다"며 "도리이의 형상으로 기호화된 단순한 이미지는 다양한 매체 속에서 재현되며 공통된 인식을 형성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피사체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방식을 통해 조선신궁의 신성함을 부각했다고 지적하고, 벚꽃과 조선신궁을 함께 찍어 인위적으로 선별된 일본식 풍경을 이용해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한 강사는 조선신궁 엽서의 아래쪽에 배치된 설명글에는 '일본은 문명', '조선은 야만'이라는 이분법적 논리가 적용됐다고 비판한 뒤 "글이 신사의 분위기나 신사에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선전하는 방식으로 활용됐다"고 말했다.

조선신궁 사진엽서. [신동규 동아대 교수 제공]

조선신궁 사진엽서. [신동규 동아대 교수 제공]

그는 "조선신궁 엽서는 매우 많이 제작됐지만, 들어가는 사진은 한정돼 있었다"며 "저작권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여서 이미지를 몰래 복제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연구는 신동규 동아대 교수와 한 강사 등 학자 6명이 주제를 나눠 진행했다. 이들은 엽서에 대한 추가 연구를 계속할 예정이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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