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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잔재] ② 가오와 곤조로 버텨왔건만…간지 안 나는 인생

송고시간2017-08-1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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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무심코 내뱉는 일본식 말…'구라, 뽀록, 기라성, 야지, 간지…'

(전국종합=연합뉴스) 김동철 기자 = 내 이름은 김광복. 나이 서른의 취업준비생이다.

대학 졸업 후 3년째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좁디좁은 취업 문을 뚫고 있다.

꽃들이 만개(활짝 핌)했지만 마음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그동안의 실패를 반카이(만회)해야 하는데….

후줄근한 몸뻬(일 바지)를 입은 초로의 어머니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학원이 끝나면 모나카(팥소 과자)와 소보로빵(곰보빵)을 사 들고 와 미안함을 대신해야겠다.

일본어 간판 [연합뉴스 자료사진]
일본어 간판 [연합뉴스 자료사진]

최근 취업한 대학 동기들은 비까비까한(번쩍번쩍한) 차를 타고 출근하는데 내 인생은 기스(흠) 났다.

토익 성적은 여전히 보합세(주춤세·멈춤세)다. 금명간(오늘내일 사이·곧) 성적이 오르겠지 하면서도 불안함은 가시질 않는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했다.

최근에 어머니와 쇼부(결판)를 봤다. 1년만 더 대기업 공채에 도전하기로.

오늘도 어제와 같은 일상이다.

아침 7시에 기상(일어남)하자마자 어머니가 해준 계란 후라이(튀김·부침)로 허기를 달랜 뒤 근거리(가까운 거리)의 아르바이트 장소인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런데 갑자기 '애마'인 신삥(신품) 오토바이 쇼바(완충기)가 고장 났다.

젠장 야마 돌겠네.(산(山)의 일본식 발음인 '야마'와 우리말의 '돌다'가 합해진 말)

구보(달리기)로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왔지만 결국 출근 시간을 못 맞췄다. 택시 메타기(미터기)가 오는 내내 춤을 춰 마음을 졸였다. 한 푼이 아쉽다.

사장에겐 배탈이 났다고 구라(거짓말)를 쳤다. 뽀록(들통)은 안 났겠지?

오늘도 사장은 쓰레빠(실내화)를 질질 끌고 다니네. 알바생들을 겐세이(견제)하는 눈빛은 늘 기분 나쁘다.

사장은 매상금(판매액)이 늘지 않고 예금 잔고(잔액)가 바닥났다고 만날 징징댄다.

아침부터 쓰메키리(손톱깎이)로 발톱 깎는 사장. 나쁜 구세(버릇·습관)가 눈에 거슬린다. 명찰(이름표)을 달지 않았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알바생을 꼬붕(부하) 대하듯 하는 그가 밉다. 미워.

세종대왕상 [연합뉴스 자료사진]
세종대왕상 [연합뉴스 자료사진]

내년도 최저임금이 시급 7천530원, 월급 157만3천770원으로 확정 고시됐다는데 이 임금(삯)을 수령(받음)할 수 있을까?

아침부터 바쁘다.

사장이 잔반 통(음식 찌꺼기 통)을 치우고 바깥 청소를 하라고 오다(지시)를 내렸다.

바께스(양동이)와 모치도구(소도구)로 청소하다가 튀어나온 못에 바지 기지(천)가 걸려 빵꾸(구멍)가 났다.

너무 크게 빵꾸나 캄푸라치(꾸밈·위장)가 안 된다.

아아, 삼마이(희극 배우) 같은 인생이여!

편의점 앞에 밤새 뿌려진 지라시(선전지·낱장 광고)를 치우고 다이(받침대)의 물건들을 정리하다 보니 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켰다.

늦은 점심은 컵라면에 다쿠앙(단무지)으로 대충 때웠다.

어릴 적 꿈은 갑종(일급·으뜸) 빠이롯트(조종사)였다. 그러나 지금의 삶은 난조(엉망·흐트러짐)다.

번듯한 스봉(양복바지)을 원했지만, 현실은 추리닝(연습복·운동복)이 어울리는 알바생이다.

바쁜 와중에 출출함에 몰려와 와리바시(나무젓가락)로 야키만두(군만두) 하나를 집어 먹었다.

빈속에 먹었던 터라 와사비(고추냉이)를 삼킨 것처럼 속이 쓰리다.

어머니가 싸준 홍삼 엑키스(진액)는 바빠서 입에도 못 댔다. 엑키스를 볼 때마다 고생하는 어머니 생각에 마음이 울컥한다.

나에게 지친 여자친구는 지난달 곁을 떠났다.

무능하다는 야지(야유)와 함께.

가오(얼굴·체면)를 구겼다. 서른 인생, 가오와 곤조(근성)로 버텨왔건만…. 잘못한 내 탓이 크다.

카렌다(달력·캘린더)를 보니 벌써 8월이다.

여름 하늘은 소라색(하늘 빛깔)으로 가득하다. 문득 센치(감상적)해진다.

이럴 때면 에리(깃) 있는 우와기(윗옷)를 간지(느낌) 나게 입었던 그녀가 사무치도록 그립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연합뉴스 자료사진]

격무(힘든 일)를 끝내다 보니 벌써 오후 8시 퇴근 시간.

해가 뉘엿뉘엿 지면 오뎅(어묵)이 잇파이(가득) 든 얼큰한 탕에 사케(일본술) 한 잔이 생각난다.

손님 응대로 바짝 마른 입을 축이는 데는 히야시(차게 함)한 맥주가 최고인데….

비루한 내 삶에선 이 모든 게 사치다.

할 수만 있다면 당구공처럼 인생을 오시(밀어치기)하고 싶다.

한때 꿈많은 청춘이었건만 지금은 작가 손창섭의 소설처럼 '잉여(나머지) 인간'이다.

누군가가 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업하고 싶었다고 말했단다.

나는 와이로(뇌물)를 써서라도 요지(이쑤시개)로 뚫기 힘들다는 취업 문을 통과하고 싶다.

그러나 삶의 와쿠(틀)는 뒤틀렸다. 내가 문제인 걸까? 세상이 문제인 걸까?

삶의 견적(추산·어림셈)이 도저히 안 나온다. 그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오늘도 어제처럼 내 구치(몫)를 못 했다는 자괴감은 머리를 가득 채운다.

해가 지니 삐끼(손님 끌기·여리꾼)들이 거리를 지배한다. 이제 취객들이 들이닥치겠지?

'일본어 잔재 청산 캠페인'[연합뉴스 자료사진]
'일본어 잔재 청산 캠페인'[연합뉴스 자료사진]

오늘 알바도 여기서 시마이(끝)!

오후 9시가 다 되어서야 지친 몸을 학원행 버스에 의탁한다. 휴….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자 기라성(빛나는 별)이 될 날은 과연 올까?

몸과 마음이 피곤한 긴 하루다.

[※ 이 기사는 광복절을 맞아 국립국어원이 발간한 '일본어 투 용어 순화 자료집'을 바탕으로 허구의 취업준비생이 일본어 투를 사용하는 일상을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sollens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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