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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영화 '춘향전'이 갖는 의미

송고시간2017-09-21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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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1935년 10월 4일. 서울 시내 단성사는 밀려드는 관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개봉하는 날이었다. 변사의 목소리가 아니라 화면 속 주인공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대사를 들은 관객들은 환호했다.

10월 13일까지 상영된 '춘향전'은 입장료가 당시로써는 고가인 1원이나 되었음에도 연일 매진을 기록했다. 1927년 세계 최초의 발성영화 '재즈 싱어'가 등장한 이후 전 세계적으로 발성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필우, 이명우 형제가 만든 발성영화 '춘향전'은 이광수의 '일설 춘향전'을 원작으로 했다. 최초의 촬영기사였던 형 이필우가 녹음, 현상 등 기술적인 분야를, 동생 이명우가 연출을 맡았으며 홍난파가 음악을 담당했다. 주인공 춘향으로는 당시 무성영화 최고의 스타 문예봉이 출연했고 이몽룡으로는 한일송이 나왔다.

영화의 역사가 짧고 제작비가 충분치 않은 데다 기자재도 부족하고 방음 설비도 제대로 없었던 상황에서 발성영화를 만들어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앞서 무성영화 '춘향전'을 보고도 감탄했던 관객들은 소리가 나는 '춘향전'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쉽게도 발성영화 '춘향전'의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발성영화 '춘향전'(1935)의 한 장면-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발성영화 '춘향전'(1935)의 한 장면-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세대를 이어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온 고전 소설 춘향전. 이 독보적인 사랑은 작품 편수에서 입증된다. 현재까지 영화로 만들어진 춘향전은 연쇄극 1편을 포함해서 모두 18편이다. 한국영화 사상 가장 많이 리메이크된 작품이다. 그때마다 춘향전은 한국영화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남겼다.

1922년 처음으로 춘향전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는 연극의 일부로 상영된 연쇄극이었다. 이어 1923년 춘향전은 본격적인 영화로 탄생했다.

1923년은 한국영화사에서 기념비적인 해이다. 최초의 극영화인 윤백남의 '월하의 맹서'가 개봉된 데 이어 김도산의 '국경'이 나왔고 바로 '춘향전'이 제작됐다. '춘향전'의 감독은 일본인 전용 극장을 운영하던 하야가와 고슈였고, 춘향은 유명한 기생 한룡, 이몽룡은 인기 절정의 조선극장 주임 변사 김조성이 맡았다. 35㎜ 9권으로 제작됐으며 배경이 되는 남원에서 현지 로케이션을 하기도 했다.

'춘향전'은 조선극장에서 개봉됐다. 작품 자체는 졸작이었으나 흥행에서는 크게 성공했다. 춘향전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사실만으로 조선인들은 흥분했다. 일본인이 주도해서 만들었지만, 조선 배우가 출연하고 조선 각본을 사용했기 때문에 조선 영화라고 생각했다. 평양과 대구 등지에서 순회 영사를 했고 일본으로 수출하기까지 했다.

'춘향전'의 인기가 치솟자 1936년에는 암행어사 이몽룡의 활약을 그린 후일담 성격의 '그 후의 이 도령'이 이규환 감독에 의해 제작됐다.

1955년 역시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이 나왔다. 해방 후 처음으로 영화화된 춘향전이었고,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한국영화의 부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최고 인기 배우 조미령이 춘향을, 신인 이민이 이몽룡을 맡은 이 영화는 1월 16일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2개월여의 장기 상영 끝에 18만 관객을 동원했다. 한국전쟁 직후 서울 인구가 180만여 명이었으니 엄청난 기록이었다. 이후 한국영화의 중흥기가 시작됐고 국도극장이 있던 충무로가 영화의 중심지가 됐다. 이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1957년 김향 감독의 '대춘향전,' 1958년 안종화 감독의 '춘향전,' 1959년 이경춘 감독의 '탈선 춘향전'이 만들어졌다.

'춘향전'(1955) 포스터와 영화 장면-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춘향전'(1955) 포스터와 영화 장면-한국영상자료원 제공

1960년대에도 열기는 계속됐다. 당대의 라이벌 감독과 여배우가 출연하는 두 편의 춘향전이 동시의 개봉하여 흥행을 겨루는 일도 벌어졌다. 1961년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이 설을 앞두고 나란히 관객들을 만났다. '춘향전'의 춘향 역에는 홍 감독의 부인 김지미를, '성춘향'의 춘향 역에는 신 감독의 부인 최은희를 각각 내세웠다.

두 영화 모두 국내 최초로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를 표방했으며 제작비도 똑같이 8천만 환이었다.

대결은 신 감독이 홍 감독보다 먼저 '성춘향'을 기획했다고 주장하며 당시 한국영화제작자협회에 진정서를 내면서 불이 붙었다. 1960년 3월부터 신 감독 측이 '성춘향'을 준비 중이었는데 홍 감독 측이 '춘향전'을 찍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홍 감독은 '제작의 자유'를 내세웠고 영화제작자협회도 홍 감독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춘향전은 창작품이 아니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고전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싸움이 반년 이상 계속되다가 개봉에 들어갔다. '춘향전'이 열흘 먼저 국제극장에서 개봉되어 기선을 잡는 듯했으나 뒤늦게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성춘향'에 관객이 몰려들었다. 대결은 '성춘향'의 승리로 끝났다.

한국영화의 공식적인 흥행사는 '성춘향'에서 시작된다. 이 영화는 명보극장에서 74일 동안 296회나 연속 상영되어 서울에서만 36만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250만 명이었다. 이 기록은 1968년 '미워도 다시 한 번'이 서울 관객 37만 명을 동원하기 전까지 유지됐다.

'성춘향'(1961) 포스터와 영화 장면
'성춘향'(1961) 포스터와 영화 장면

1963년 제작된 이동훈 감독의 '한양에 온 성춘향'은 이몽룡-성춘향 부부와 변학도의 재대결을 그린 속편 격 작품이었고, 1968년 김수용 감독의 '춘향'은 신인 홍세미가 공모를 통해 데뷔한 작품으로 크게 흥행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70㎜ 영화는 '춘향전'이었다. 1971년 이성구 감독이 처음으로 70㎜ 대형 영화 '춘향전'을 제작했다. 이어령 각본에 문희가 춘향 역을, 신성일이 이몽룡 역을 맡았다. 70㎜ 촬영기는 이 영화의 촬영기사 장석준이 순수한 우리 기술로 제작한 것이다.

1972년 이형표 감독의 '방자와 향단이'는 무대를 현대로 옮겨 코믹하게 변형한 춘향전이었다. 1976년에는 장미희-이덕화 주연의 '성춘향전'이 박태원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후 10년 넘게 주춤하다가 1987년 한상훈 감독이 현대적 감각의 '성춘향'을 내놓았다.

2000년 1월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개봉됐다. 소설 판본이 아닌 조상현 명창의 1975년 '춘향전 완판본'을 원안으로 하여, 소리꾼이 무대에서 판소리를 부르는 설정을 한 편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 영화 자체가 소리에 합류하도록 했다. 조승우의 영화 데뷔작인 이 영화는 그해 5월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53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본선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비록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세계 영화계에 한국영화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춘향뎐'(2000) 포스터와 장면-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춘향뎐'(2000) 포스터와 장면-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받아온 고전 소설은 단연 춘향전이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양반 이몽룡과 기생의 딸 성춘향의 신분의 벽을 넘은 사랑 이야기로, 해학적이고 풍자적이며 평민의식을 담고 있다. 조선 영·정조 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나 작자와 창작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설화가 판소리로 불리다가 소설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인 줄거리는 같지만, 부분적으로 내용이 다른 이본이 120여 종이 전해진다. 이는 단순한 전래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를 초월해서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며 함께 울고 웃었던 동반자였다.

그동안 춘향전은 판소리로, 창극으로, 소설로, 연극으로, TV 드라마로, 오페라로, 뮤지컬로, 영화로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으로 만들어져 사랑받았다.

이 땅에 영화가 들어오자마자 당연히 춘향전의 영화화부터 진행됐다.

춘향전은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새롭게 영화로 만들어질 때마다 기존 해석과 다른 자유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새로운 매체와 결합하여 이전 표현 방식에 도전했다. 달라진 영화 환경에 대한 실험이었고, 침체기를 이겨낸 활로였으며, 흥행의 보증수표이기도 했다.

고전은 고리타분한 것이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한국영화사의 고비마다 춘향전은 우리와 함께 호흡했다. 앞으로 새로운 해석, 새로운 형식의 새 '춘향전'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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