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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여자라고 함부로…성폭력ㆍ차별 어디에나 있어"

송고시간2018-02-0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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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27명, 직접 당한 피해 경험 쓴 책 '걸 페미니즘' 출간

"어린 여자라고 함부로…성폭력ㆍ차별 어디에나 있어" - 2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 "대부분의 아르바이트가 높은 노동 강도에 비해 급여가 낮았다. 그런 곳은 일단 알바 노동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중략) 한 달 이상 버티기가 불가능했다. 또 다른 이유는 지긋지긋하고 일상적이었던, 성희롱 문제였다. 신경을 곤두세워 계속해서 잡아내지를 못했던 것뿐, 성희롱이나 성차별적 발언은 어디에나 있었다. 정말 어디에나!"

'피아'라는 필명을 쓰는 한 여성 청소년은 신간 '걸 페미니즘'(교육공동체벗)에 쓴 '여성 청소년이 알바를 하면- 나의 임금 노동 연대기'라는 글에서 이런 경험을 털어놓는다. 그가 들려준 노동 현장의 '일상다반사' 성폭력 사례 중 하나는 이렇다.

"그중 내가 기억하기로 가장 역겨웠던 성희롱은 휴게소에서 설거지 알바를 하던 때에 일어난 것이었다. 정말 일이 끔찍하게 힘들었고 쉬는 시간은 아예 없는 곳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4시간쯤 지나자 나는 완전히 질려 버려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남자 주방장은 "일이 힘들지?" 하며 말을 걸더니 쓰레기를 함께 버리고 오자고 했다. 난 그 지옥 같은 설거지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게 마냥 신나서 좋다고 했다. 그러나 쓰레기봉투를 챙겨 들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자 남자 주방장은 은근슬쩍 내 엉덩이를 두들기며 "일을 잘하는 좋은 애를 데리고 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남자 주방장은 "배가 부르다니, 임신했냐? 열 달 동안 배부르게 해 줄까?" 같은 말들을 농담이라며 한다.

'치리'라는 필명의 청소년도 '내게도 밤에 안전할 권리를- 여성 청소년도 두려움 없이 다니고 싶다'라는 글에서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할 때의 일들을 소름끼치는 기억으로 떠올린다.

"가끔 오는 이들 중에서는 매우 취했으면서 굉장히 예의 바른 이들도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런 사람들이 많은 날은 가끔이었고, 그 '가끔'이 아닌 날에는 언제나 그렇지 않은 이들이 왔다. 불쾌한 시선을 던지고, 깔보고, 무시하는 이들. (중략) 거스름돈을 거슬러 주는 손을 잡으며 "손이 따뜻하시네요"라고 웃던 사람, 담배를 찾는 나의 뒷모습을 보면서 "애 잘 낳겠네"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던 사람도 있었다."

'라일락'이라는 필명의 청소년은 '나만의 경험이 아닌 경험-서랍 속에 묻어 뒀던 성폭력의 기억'이란 글에서 중학교 때 막 사귀기 시작한 남자친구가 강제로 키스를 하고 몸을 만진 뒤 며칠 뒤에는 '알몸 사진을 보내라'는 문자메시지까지 보낸 일을 털어놓는다. 몇 년 뒤에는 어쩌다 한 방에 있던 다른 친구(남자)에게서 추행을 당해 불쾌하고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으려 여성가족부가 운영하는 여성긴급전화 1366에 전화를 하는데, 상담원으로부터 "그런데 남자인 친구랑 어쩌다가 한 방에 있었어요?"라는 말을 듣는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 1일 오전 대구지방검찰청 앞에서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흰 장미를 달고 검찰 내 성폭력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흰 장미는 성폭력 피해 고발 캠페인인 '미투'를 상징한다. 2018.2.1

청소년들은 이런 피해를 당해도 이야기를 꺼내거나 문제 제기를 하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성폭력 가해자가 주로 가족이나 교사, 고용주 등 일상에서 밀접하며 권력적으로 우위에 있는 경우가 많은 것도 큰 이유 중의 하나"다. 또 우리 사회는 약자인 여성ㆍ청소년에게 '조신한 행실', '처신을 잘해야 한다'는 등 규범을 들이대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자극적이고 심각한 사건만을 성폭력으로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도 피해자들을 움츠러들게 한다. "그래서 그보다 덜해 보이거나 가까운 사람에게 당한 성폭력에 대해서는 자신의 경험이 성폭력이 맞는지 내가 충분히 저항했는지 끊임없이 스스로 의심하게 되기도 한다."

남성 청소년인 '조행하'는 '페미니즘을 만난 남학생- 남학교 청소년이 바라본 여성혐오'라는 글에서 일상적인 여성 오와 성폭력을 낳는 남학교의 문화를 지적한다.

"여학생들은 당하지만 자신들은 절대 당할 일이 없는 차별과 억압에 대해 그들은 생각해야 할 필요가 없었고, 사회가 낙인찍은 성별이분법적인 고정 관념에 따라, 오직 둔감하고 본능적이며 섬세하지 못하기만 하면 정상적인 남자애로서 대우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남자아이들이 모인 남학교는 그야말로 엽기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반 학생들이 모이는 카톡방, 반톡은 틈만 나면 여성 연예인들의 노출 화보와 '직캠' 사진, 여성에 대한 외모 품평, 성희롱으로 종종 도배되고는 한다. 어떤 경우는 옆 학교 어느 여학생의 SNS 프로필 사진이 대화창에 등장한다. (중략) 교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교사가 원활한 수업의 진행을 위해(?) 재미도 없는 성적인 농담을 내뱉는다든지, 어느 여자 아이돌의 얼굴과 몸매가 어떻다는 이야기, 혹은 여자 친구가 생기면 술을 어떻게 '먹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 책 '걸 페미니즘'은 청소년 27명이 각자 학교와 사회에서 당한 폭력과 차별의 경험을 털어놓으며 '페미니즘'을 만나 상처를 치유하고 해방감을 맛본 이야기를 엮은 것이다. 최근 사회 각계에서 피해 경험을 털어놓는 '미투' 운동이 뜨거운 가운데, 가장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여성 청소년들의 이야기에는 큰 울림이 있다.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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