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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의 시선] 시인 한하운과 소록도

송고시간2018-02-15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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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오래간만에 장장이 시(詩)다운 시가 담겨진 귀한 시집을 하나 손에 할 수가 있었다. 이것이 한하운시집이었다. 처음 날은 다 읽지 않을 수 없었고 그다음에는 하루에 한편 이상 맛보지 않기로 하며 서서히 음미해 보았다… 이 시인은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올시다"고 절통하게 부르짖었는데 그는 분명 성한 누구보다도 성한 시인이다. '보리피리,' '국토편역,' '결혼유한,' '인골적' 등은 다섯 번 여섯 번 읽어도 또 읽고 싶은 시들이다. 시를 공부하는 이들 애호하는 이들 또 인생을 알려는 이들에게 서슴지 않고 나는 시집 '보리피리'를 권한다."

시인 노천명이 동아일보 1955년 6월 14일 자에 기고한 한하운 제2 시집 '보리피리'의 서평이다.

한센병 시인으로 잘 알려진 한하운은 병마로 인한 처절한 체험을 소재로 한 작품들로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었다.

오는 28일은 그가 험난한 생을 마감한 날이다. 또한, 24일은 1916년 한센인들을 위한 최초의 의료시설 소록도 자혜의원이 문을 연 날이다.

한하운
한하운

한하운은 1919년 3월 20일 함경남도 함주에서 지식인 지주의 아들로 출생했다. 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이리농림학교에서 수의 축산학을 공부했다. 1936년 봄, 몸 곳곳에 콩알만 한 결절이 생기고 궤양이 퍼지더니 결국 한센병 확진 판정을 받았다. 한하운의 나이 17세, 이리농림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1937년 졸업하고 병세가 호전되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케이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해 1939년 귀국했다. 얼마 동안 요양을 한 뒤 그해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대학교에서 축목학을 전공하고 1943년 돌아왔다.

1944년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에 들어가 개마고원과 경기도 용인군 등으로 옮겨 다니며 근무했다. 그러나 갈수록 증세가 겉으로 나타나자 1945년 봄 도청을 그만두고 낙향했다.

해방 후 부재지주로 몰려 가산을 몰수당했다. 치료비로 남은 재산을 탕진하고 약을 구하기 위해 1948년 월남했다.

1949년 서울 명동에 '시를 파는 문둥이 거지'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진다. 유랑생활을 하던 한하운은 구걸의 대가로 시를 종이에 적어 주었다. 몇몇 시인들의 관심을 끌어 이들의 도움으로 1949년 '신천지' 4월호에 '나시인 한하운 시초'라는 제목으로 '전라도 길' 외 12편이 한꺼번에 실렸다. 이 시들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어 다음 달 첫 시집 '한하운 시초'가 출간됐다.

한하운은 경기도 수원시 세유동의 한센병 환자 정착촌 하천부락에서 지내다가 1950년 3월 인천시 부평의 한센병 환자 마을 성혜원으로 이주해 투병하는 한편 1952년 5월 부평에 신명보육원을, 1953년에는 경기도 용인에 동진원을 설립했다. 또한, 같은 해 대한한센연맹위원회장을 맡아 한센병 환자 구제사업에 힘썼으며 1958년에는 청운보육원을 설립했다.

1953년 8월 한 주간지가 '한하운 시초'에 실린 작품 '데모'의 일부 표현을 문제 삼아 한하운을 좌익으로 몰아세웠고 심지어 한하운이 가공의 인물이라고까지 주장했다. 이 사건은 확대되어 경찰과 검찰, 국회에서까지 문제가 됐다. 한하운은 직접 서울신문을 찾아가 즉석에서 '보리피리'를 써 보이며 자신이 실재 인물임을 증명했다. 이어 문제가 된 시의 표현도 불온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어 사건은 마무리되고 서울신문 10월 15일 자에 그의 대표작 '보리피리'가 실렸다.

1955년 두 번째 시집 '보리피리'가 나온 데 이어 5월부터 잡지 '희망'에 자전소설 '고고한 생명-나의 슬픈 반생기'를 연재했다. 1956년에는 '한하운 시 전집'을 발간했다.

1959년 '한하운 자작시 해설집'을 내놓은 지 얼마 안 돼 그의 한센병이 음성으로 판명됐다. 그는 사회에 복귀, 1960년 8월 서울 명동에 출판사 무하문화사를 설립했다. 해설집 '황토길'을 펴내고 활발히 작품을 발표했으며 1962년에는 미 공보원에 의해 그의 반생을 그린 극영화 '황토길'이 제작되기도 했다. 1966년에는 한국사회복귀협회장을 맡았다.

그러나 간 경화증에 시달리다가 1975년 1월 28일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한센병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감상이나 원망으로 흐르지 않고 마치 남의 일을 말하는 듯한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서정적이고 민요적인 가락으로, 생명과 건강한 삶을 염원하고 있다.

소록도 자혜병원 본관
소록도 자혜병원 본관

한하운 하면 소록도가 떠오른다. 그는 한때 이곳에서 요양했다.

그의 대표작 '전라도 길'에는 '소록도로 가는 길'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국립소록도병원 중앙공원 내 일제강점기 한센인들의 강제노역을 상징하는 '메도 죽고 놓아도 죽는 바위'에는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로 시작하는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다.

고흥반도 서남쪽 끝 녹동항 앞바다 소록도는 둘레가 14㎞ 정도 되는 작은 섬이다. 이곳에서 한센인의 진료와 요양, 복지 및 자활 지원을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운영되고 있다.

1916년 2월 24일 일제가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 수용하기 위해 세운 자혜의원이 시초이다. 1934년 10월 1일 소록도 갱생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해방 후 1949년 5월 6일 중앙나요양소, 1960년 7월 1일 국립소록도병원, 1968년 11월 8일 국립나병원, 1982년 12월 31일 국립소록도병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7년 말 기준으로 한센인 511명이 머물고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원장들은 한센병 환자들을 동원하여 건물을 짓고 섬을 가꾸었다. 참혹한 강제노동을 견디다 못해 많은 환자가 희생됐다.

한센병은 유전병으로 잘못 알려져 이들을 상대로 낙태, 단종 조치가 취해졌다. 소록도에서는 1936년부터 단종수술을 부부 동거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당시 피해를 본 한센인들은 2007년 설치된 한센인 피해사건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단종·낙태 피해자로 인정을 받았으나 국가가 배상을 거부하자 2011년부터 2015년까지 540여 명이 6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2월 17일 한센인 단종·낙태 조치에 국가가 배상 책임이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처음으로 나왔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마리안느와 마가렛

소록도에 어두운 역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리안느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렉은 오스트리아 그리스도왕 시녀회라는 가톨릭 재속회 회원이었다. 인스브루크 간호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각각 1962년과 1966년 20대에 한국 땅을 밟았고, 소록도에서 평생 봉사활동을 펼쳤다. 이들은 나이 70살이 넘자 섬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며 2005년 11월 21일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그곳을 떠났다.

지난해 3월 이들의 헌신적 삶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개봉됐으며, 11월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 노벨평화상 범국민 추천위원회'가 발족했다.

한하운 묘
한하운 묘

한하운은 널리 알려진 시인이다. 그러나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문단에서 합당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이 기피하는 한센인으로서 소외된 주변부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가 살았던 인천시 부평구에서는 지난해 9월 학술심포지엄이 열려 그의 생애와 작품을 돌아봤다. 부평역사박물관은 지난해 12월 십정동 백운공원에서 한하운 시비 제막식을 했다. 시비에는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고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로 시작하는 또 다른 대표작 '파랑새'를 상징하는 새 한 마리가 조각돼 있다.

한하운은 "시는 눈물로 쓴다"라고 말했다. 그의 시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끝까지 생의 의지를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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