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본문 바로가기 메뉴 바로가기

연합뉴스 최신기사
뉴스 검색어 입력 양식

그리움 딛고 쌓아올린 화려한 색채추상…이성자를 만나다(종합)

송고시간2018-03-20 14:54

이 뉴스 공유하기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본문 글자 크기 조정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서 회고전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22일 개막

이성자, 내가 아는 어머니, 캔버스에 유채, 130x195cm, 1962
이성자, 내가 아는 어머니, 캔버스에 유채, 130x195cm, 1962

[개인 소장·국립현대미술관 제공=연합뉴스]

(과천=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나이 서른셋의 한 여성이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결혼생활 12년 만의 파경, 어린 세 아들과의 생이별, 부산 피란생활 도중 겪은 전란의 참혹함으로 더는 이 땅에서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다. 산 설고 물도 선 프랑스에서 그가 다시 일어서도록 끌어준 것은 그림이었다.

재불 서양화가 이성자(1918~2009) 이야기다. 그는 동양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국적 소재를 서양화 기법으로 풀어냈다. 눈부시게 화려한 색채, 끊임없는 작업의 변화, 1만3천여 점에 이르는 방대한 작업량은 한국에서 미대도 나오지 않은 그를 한국 추상회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로 만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번 전시까지 포함해 3차례 전시를 연 점도 이성자의 위치를 전해준다.

20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만난 박미화 학예연구관은 1960년대 이성자의 점화 '내가 아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김환기 못지않은 화가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이성자를 기념하는 전시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이 이틀 뒤 과천관에서 개막한다.

이번 전시에는 회화와 판화 등 시기별 대표작 127점과 아카이브가 나왔다. 전시는 시기별 대표작을 1950년대 '조형탐색기', 1960년대 '여성과 대지', 1970년대 '음과 양', 1980년대부터 작고 전까지인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등 네 주제로 나눠 소개한다.

이성자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전시장
이성자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전시장

(과천=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20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을 찾은 관람객이 이성자 회고전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을 감상하고 있다. airan@yna.co.kr 2018.3.20.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짓센대 가정과를 나온 그가 프랑스에서 의상 디자인 공부를 시작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전시장에 몇 점 나온 의상 디자인 데생은 지금 보아도 형태나 색감 모두 촌스러운 흔적이 없다. 순수미술 재능을 알아본 선생의 권유로 그는 1953년 회화 공부를 시작했다. 첫 번째 공간은 다양한 조형 실험을 거쳐 추상에 천착하기 시작한 시기를 조명한다. 이 가운데 '천사의 땅'(1958)은 화면의 구축, 언어를 초월하는 기호를 담은 수작이다.

"3평도 안 되는 작업실에서 손을 호호 불어가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림을 그리더라." 당시 같은 재불 유학생으로, 이성자 작업실을 찾았던 유준상 전 서울시립미술관장의 이야기다. 치열하게 그림을 그렸던 원동력은 가족, 특히 세 아들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작가는 작고 직전인 2008년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붓질을 하면 우리 아이들 밥 한술 떠먹이는 것이고 붓질을 한 번 더 하면 우리 애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라 여기며 자꾸자꾸 그렸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프랑스 화단과 시장에서 점차 인정받으면서 화업도 나날이 발전했다. 극단적인 모더니스트였던 스승과는 달리, 끓어오르는 감정을 자유롭게 펼쳐냈다는 점에서 어느 사조에도 속하지 않으려 했던 이성자의 면모를 일찌감치 엿볼 수 있다.

그는 1960년대가 되면서 직선과 삼각형, 사각형, 원 등을 촘촘한 붓질로 그려내면서 '여성과 대지'라는 주제를 표현했다. 그 아래에는 "나는 여자이고, 여자는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대지"라는 철학이 깔렸다.

이성자, 오작교, 캔버스에 유채, 164x114cm, 1956, 개인소장
이성자, 오작교, 캔버스에 유채, 164x114cm, 1956, 개인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연합뉴스]

1965년작 '오작교' 앞에서 발걸음이 자연히 머물게 된다. 모국과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담은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본 조병화는 같은 제목의 시를 바쳤다. "일 년에 한 번/ 만났다 헤어지는 사랑을 위한/ 하늘의 다리// 이것은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만 놓이는/ 동양의 다리다// 그리움이여/ 너와 나의 다리여."

작가는 한국을 떠난 지 15년 만에 귀국했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연 첫 한국 개인전, 훌쩍 자란 아이들과의 해후, 어머니 죽음 등을 거치면서 한결 자유로워졌다. '음과 양' 시기, 작품에서 치밀한 터치는 사라지고 자유로운 선과 원의 형상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공간에서는 30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 이후 작고할 때까지 제작한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시리즈와 '우주' 시리즈를 새롭게 만날 수 있다. 은하수를 담아낸 듯한 몽환적인 유화들은 말년의 작가가 양국을 오가는 비행기 속에서 본 극지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진가를 일찌감치 알아본 비평가 조르주 부다이유, 화가 소니아 들로네 등 프랑스 미술계와 교류했던 흔적을 느껴볼 수 있다. 박 연구관은 "이미 1988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 많은 작품이 나온 만큼 새롭게 작품을 발굴한다기보다는 이미 파리 화단에 충분히 자리 잡았던 작가의 사회적 교류 부분을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1977년 당시의 이성자
1977년 당시의 이성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연합뉴스]

미술관 1층의 아카이브 공간에서는 생전 인터뷰가 상영 중이다. 이성자가 "내 인생의 완성을 시도한 작품"이라고 칭했던 프랑스 투레트의 작업실을 본뜬 곳이다.그림을 그리는 이유로 "동양화는 물질적 해석이 없고 서양화는 물질만 갖고 씨름하지, 정신이 없다"는 작가의 말에서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이성자 전시는 같은 건물에서 열리는 이정진 사진전과 함께,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았던 한국 여성 미술가들을 조망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전시는 7월 29일까지. 문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 02-2188-6000.

이성자,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캔버스에 아크릴릭, 150x150cm, 1990
이성자,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길, 캔버스에 아크릴릭, 150x150cm, 1990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소장·국립현대미술관 제공=연합뉴스]

airan@yna.co.kr

댓글쓰기
에디터스 픽Editor's Picks

영상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