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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사진으로 다시 보는 해방 공간의 제주, 그리고 4·3

송고시간2018-03-30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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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람들의 피와 눈물, 70년의 한(恨) 서린 비극의 단면들

(제주=연합뉴스) 박지호 기자 = 제주4·3 70주년을 앞두고 4·3에 대한 관심과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열기가 새삼 높아지고 있다.

제주4·3 진상보고서와 제주4·3평화공원 내 전시 자료, 이달 31일부터 제주문예회관에서 열리는 '기억투쟁 70년, 4·3 기록사진전'의 사진 설명 등을 바탕으로 4·3의 전개 과정을 흑백 사진과 함께 재구성해봤다.

기사 속 사진의 대부분은 당시 제주에 주둔 중이던 미군과 국군 2연대 소속 장병들이 촬영한 것이다.

◇ 해방 당시 제주도는 일본군 요새

일제는 패망 직전인 1945년 3월 제주도를 본토 방어 결전지로 이용하기 위해 '결(決) 7호 작전'을 진행했다.

송악산에 설치된 일본군의 대공포
송악산에 설치된 일본군의 대공포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7만5천명의 병력이 제주에 주둔하며 섬 전역을 군사 요새화했다.

1945년 8월 제작된 일본군 제주 작전지도
1945년 8월 제작된 일본군 제주 작전지도

일본군은 해안 곳곳에 미군 함정을 공격하기 위한 동굴 진지를 구축했다. 대표적인 곳으로 송악산과 성산 일출봉, 서우봉, 수월봉, 삼매봉 해안 등이 있다.

송악산의 경우 해안 동굴진지 외에 '알뜨르'란 드넓은 벌판에 비행장까지 건설하고, 주변에는 격납고와 탄약고, 고사포 진지, 지하벙커까지 들어섰다.

일본군에 의해 요새화된 대정읍 일대의 모습
일본군에 의해 요새화된 대정읍 일대의 모습

◇ 일본의 항복, 해방 그리고 미군정, 분단의 시작

1945년 8·15광복 이후 20여일 만인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다음 날 서울에 도착했다.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성조기 게양식 모습.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성조기 게양식 모습.

그해 11월 9일 미군 제59군정중대가 제주도에 들어왔다. 지휘관 스타우트 소령은 제주도를 통치하는 도사(島司)로 부임했다.

그가 초기에 역점을 뒀던 분야는 치안 유지와 재산 관리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식민 통치기구에서 일하던 경찰과 관리를 재등용해 민심을 자극했다.

1946년 미군정청이 사용하던 제주지법에 게양된 성조기
1946년 미군정청이 사용하던 제주지법에 게양된 성조기

1946년 8월 1일 제주도는 행정구역상 전라남도에서 분리돼 남한의 아홉 번 째 도(道)로 승격됐다.

도제 실시와 함께 군경 조직도 신설 또는 확대 개편됐다. 그해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창설됐고, 경찰 조직도 전남경찰청 산하의 경찰서에서 제주경찰감찰청으로 승격됐다.

◇ 갈등, 무력 충돌과 비극의 시작

4·3의 도화선은 1947년 3월 1일 제주시 관덕정 북쪽에 있는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린 '제28주년 3·1절 기념대회'였다.

기념대회에는 2만5천∼3만 명의 도민들이 운집해 '통일독립 전취', '친일 모리배 척결' 등을 외쳤다.

이날 가두시위에서 기마 경찰이 탄 말에 어린이가 차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경찰이 그대로 가려고 하자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에 경계를 서던 경찰이 발포해 6명이 숨지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기관총으로 경계중인 제주경찰감찰청의 모습
기관총으로 경계중인 제주경찰감찰청의 모습

미군정은 제주에 조사단을 파견했지만, 조사 보고서는 "경찰 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며 "제주 인구 70%가 좌익 동조자"라고 결론 내렸다.

미군이 사용하던 제주비행장
미군이 사용하던 제주비행장

당시 책임자 처벌 및 피해 보상 등의 조치가 따랐다면 우발적인 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찰은 행사 관계자와 학생들을 잡아 가뒀고, 제주도민들은 관공서까지 참여하는 3·10 민관 총파업으로 맞서게 된다. 파업엔 제주도청을 비롯한 관공서, 금융기관, 학교 등 166개 기관과 단체의 4만1천여명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됐다.

1948년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서북청년회 단원들
1948년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서북청년회 단원들

제주도가 '빨갱이 섬'으로 지목되면서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속속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 교육 기관 등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1948년 초에 그 수가 760명까지 불어났다.

3·1사건 이후 1948년 4·3 이전까지 민간인과 경찰의 충돌이 잦아지면서 경찰에 체포돼 구금된 이들은 2천500명까지 늘었다. 1948년 3월 작성된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3평 남짓 감방에 무려 35명이 수감되기까지 했다.

1948년 3월 당시 제주 유치장의 상황을 기술한 미군 보고서
1948년 3월 당시 제주 유치장의 상황을 기술한 미군 보고서

1948년 3월 경찰이 연행한 학생과 청년 등 3명이 모진 고문 끝에 숨졌지만, 경찰은 이를 은폐하기 급급했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350명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 단원의 집을 습격했다.

1948년 5월 압수된 무장대의 무기들
1948년 5월 압수된 무장대의 무기들

350명으로 사직한 무장대는 봉기 전 기간 500명을 넘지 못했다. 봉기 당시 무기는 소총 27정, 권총 3정, 수류탄 25발, 죽창 등이었다.

1948년 5월 생포된 무장대원들
1948년 5월 생포된 무장대원들

토벌대는 강경 진압을 합리화하기 위해 무장대 숫자를 과장하고, "남한 각지에서 모집한 백정"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 이후에도 사태가 평화롭게 해결될 기회는 있었다.

김익렬 9연대장은 그해 4월 22일 평화협상을 제안하는 전단을 살포했고, 28일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의 평화협상을 통해 72시간 내 전투중지, 무장해제와 하산 이후 주모자들의 신변 보장 등을 합의했다.

하지만 3일 뒤인 5월 1일 우익청년들이 10여 채의 민가를 불태우는 속칭 '오라리 방화사건'이 터졌다. 김익렬 9연대장은 현장 조사 끝에 우익 청년단원들이 저지른 방화임을 밝혀냈다.

1948년 '오라리 방화사건' 당시 미군이 항공촬영한 오라리의 모습
1948년 '오라리 방화사건' 당시 미군이 항공촬영한 오라리의 모습

하지만 미군은 김익렬 연대장의 보고를 묵살했다. 김익렬은 방화 주동자를 체포하고 평화협상을 유지하려 했지만, 미군정이 5월 3일 경비대에 내린 총공격 명령으로 진압작전은 걷잡을 수 없는 유혈충돌로 번져갔다.

미군의 작전 변경은 5·10 총선을 앞두고 사태를 조기 진압하기 위한 하지 주한미군 사령관의 결정 때문이었다.

제주에 온 딘 군정장관 일행
제주에 온 딘 군정장관 일행

5월 5일 딘 군정장관은 군경 수뇌부를 이끌고 제주로 와서 회의를 열었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4·3 사건을 '계획된 공산폭동'으로 규정하고 강경 진압을 주장했다. 이에 김익렬 연대장은 입산자들이 늘어나는 것을 경찰의 실책으로 보고, 무력과 선무공작을 병행하는 방식으로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 대응해야 한다고 맞섰다.

그 결과 김익렬 연대장은 강경파인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됐다.

◇ 한라산으로 올라간 사람들

1948년 5월 중산간으로 피신한 주민들의 모습
1948년 5월 중산간으로 피신한 주민들의 모습

1948년 5월 10일 선거일을 앞두고 제주도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선거관리사무소가 습격을 당하거나 선관위원들이 살해당하는 일이 잇따라 발생했다.

무장대는 선거를 보이콧하는 방법으로 주민들을 산으로 올려보냈다. 주민들의 산행은 5월 5일께부터 시작됐고, 이들은 마을 인근의 오름이나 숲으로 가서 머물다 선거가 끝난 후에야 돌아왔다.

산에서 내려오는 주민들
산에서 내려오는 주민들

선거 당일 마을에는 경찰 가족이나 대동청년단 간부, 선거관리위원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제주도의 3개 선거구 중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 선거가 무효가 됐다. 미군정은 재선거를 명했지만,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고 재선거마저 연기됐다.

1948년 5월 산에서 내려오는 주민들 모습.
1948년 5월 산에서 내려오는 주민들 모습.

총선이 무산된 직후인 5월 12일 미군은 구축함을 보내 해안을 봉쇄하고 강경 진압을 명령했다.

박진경 연대장은 6주간 4천명을 체포하는 등 강경책을 펴다 6월 18일 새벽 부하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박진경 9연대장 추도식
박진경 9연대장 추도식

딘 군정장관은 이날 제주농업학교에서 추도식을 열었다.

새로 9연대장이 된 송요찬은 1948년 10월 17일 "해안선에서 5㎞ 이상 떨어진 산간지역 통행을 금하고, 위반하는 자에 대해 그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폭도로 인정해 총살한다"는 포고령을 발포했다. 이어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며 '초토화' 작전은 본격화됐다.

무장대로 위장한 2연대 특공대
무장대로 위장한 2연대 특공대

토벌대는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간 중산간마을에서 무차별 방화와 학살을 자행했다.

주민들을 해변 마을로 강제이주시키고, 주민감시체제를 구축했다. 무장대의 보급과 은신을 막는 것이 소개(疏開)작전의 목적이었다.

바닷가 마을엔 주민들이 동원돼 돌로 만든 담이 만들어졌다. 그 길이는 무려 150㎞에 이르렀다. 주민들은 섬 주변에서 24시간 보초를 서야 했다.

1949년 1월 주민들이 동원돼 만들어진 해안마을의 담
1949년 1월 주민들이 동원돼 만들어진 해안마을의 담

무장대는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자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마을을 습격해 주민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그들은 세력이 약화하자 식량을 약탈하거나, 젊은이들을 납치하기도 했다. 이 같은 행위는 무장대가 주민들과 분리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1948년 9월 한라산 정상아래서 작전중인 9연대
1948년 9월 한라산 정상아래서 작전중인 9연대

토벌대의 분별없는 학살극에 한라산으로 피신하는 주민들도 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피난민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산에 피신한 사람들의 모습
산에 피신한 사람들의 모습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 사령관 유재흥 대령은 선무공작을 폈다.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는 제안이었다.

1949년 4월 하산한 주민들 가운데 무장대 협력자를 색출하는 심문반
1949년 4월 하산한 주민들 가운데 무장대 협력자를 색출하는 심문반

그 결과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 위주의 1만여 명이 백기를 들고 하산했다. 하산민들 가운데 일부 노약자들은 곧 풀려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주정공장을 비롯한 수용소에서 수개월 간 감금된 채 심문을 받았다.

하산자들이 수용됐던 주정공장
하산자들이 수용됐던 주정공장

그리고 이들은 1949년 6월과 7월 불법적인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심문받기 전의 수용자들
심문받기 전의 수용자들

군법회의에서 젊은 남자들은 대부분 사형이나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여성들도 남편과 아들이 사라졌다면 연좌제 판결을 받았다. 그 결과 1천660명이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되거나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졌다.

무장대는 1949년 1월 12일 제2연대 주둔지를 총공격했으나 51명의 사망자를 내고 패퇴하면서 세력이 급격히 약해졌고, 3월께엔 궤멸상태가 됐다.

사살된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신
사살된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신

1949년 6월 7일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경찰에 사살됐다. 경찰은 관덕정 옆에 이덕구의 시신을 나무 십자가에 매달아 어린 학생들까지 구경하도록 했다.

4·3 기간 형무소에 수감된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0년 7월께 집단학살됐고, 제주도 내 4개 경찰서에 구금됐던 이들은 같은 해 8월 중순 바다에 수장되거나 총살돼 암매장됐다.

형무소에서 사살된 수용자들의 시신
형무소에서 사살된 수용자들의 시신

4·3으로 희생된 인명 피해는 2만5천에서 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에서 결정된 희생자는 1만4천232명, 유족 5만9천426명에 그치고 있다.

jiho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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