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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사후 관에 32회 옻칠한 까닭은

송고시간2018-04-2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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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외규장각 의궤 연구: 흉례Ⅱ' 발간

효종이 묻힌 영릉. [문화재청 제공]

효종이 묻힌 영릉. [문화재청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이 1659년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왕이 눈을 감으면 염습한 뒤 '재궁'(梓宮)이라고 하는 관에 시신을 안치했다. 재궁은 보통 왕이 살아 있을 때 준비했다.

시신 염습은 내시 외에 효종과 효종 비 친인척이 담당했고, 대신과 관원들이 그 과정을 지켜봤다. 하지만 효종 시신은 본래보다 부어 재궁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에 나무판을 덧붙여 재궁을 늘리고, 32회 옻칠을 하기로 했다.

이러한 장례 절차는 조선왕조실록과 '효종빈전혼전도감의궤'(孝宗殯殿魂殿都監儀軌)에 잘 보인다.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과 국가 주요 행사를 그림과 문자로 정리한 책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24일 발간한 학술서 '외규장각 의궤 연구: 흉례Ⅱ'에 실린 논고 '효종 재궁의 개조와 그 정치적 성격'에서 박미선 전남대 강사는 "재궁 개조와 가칠은 현종대 정치적 논란의 소재가 됐다"고 강조했다.

박 강사는 "재궁 가칠은 재위 기간에 맞춰 칠하는 것이 고사(古事)였다"며 "효종은 10년을 재위했으므로 10번만 가칠하면 됐고, 32회 가칠은 과중한 면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남인인 허목은 재궁 가칠 범주와 횟수를 제한하자는 상소를 올렸으나 현종은 효성을 이유로 이를 따르지 않았고, 남인은 염할 때 시신을 꽉 묶지 말자는 의견을 제시한 서인 송시열을 옻칠 논란 책임자로 지목했다고 박 강사는 부연했다.

결국 봉심(奉審) 최고 책임자인 정태화가 사죄하고, 송시열과 송준길은 낙향했다.

박 강사는 "재궁은 단순히 시신을 안치하는 관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었다"며 "재궁 개조는 사후 국왕을 잘 보필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정치적 공세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외규장각 의궤 학술서에는 이외에도 논고 7편이 실렸다. 그중 '19세기 효명세자의 상례 절차와 지출 구조'에서 최주희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은 헌종 생부인 효명세자(1809∼1830) 상례에 6만3천359냥9전4푼, 쌀 2천400석, 콩 200석을 사용했고 특히 재원에서 동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고 밝혔다.

인조국장도감의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인조국장도감의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은 상설전시관 1층 조선실에 전시하는 외규장각 의궤를 '인조국장도감의궤'(仁祖國葬都監儀軌) 등으로 교체했다. 외규장각 의궤는 3개월 간격으로 교체 전시된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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