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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지 않고 함께 나누자는 게 부도덕하다고?

송고시간2018-06-21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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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21세기 기본소득'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기후 변화, 자원 고갈, 성장 정체, 불평등 심화,…

인류의 미래 전망을 어둡게 하는 난제 목록에 최근 하나가 더 추가됐다. 4차 산업혁명이 불러일으킨 자동화의 물결이다.

인공지능(AI), 로봇, 자율주행 자동차가 확산할수록 일자리는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럴수록 부와 소득 창출 능력을 갖춘 일부 사람과 그렇지 못한 대다수 사람 간 격차는 커지고, 경제적 불평등은 깊어지며,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은 확대할 것이다.

이런 디스토피아적 파국을 피할 길은 없을까.

이에 대한 유력한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이 '기본소득(basic income)'이다.

기본소득 주창자인 필리프 판 파레이스 벨기에 루뱅대학 교수는 최신 저서 '21세기 기본소득'(흐름출판 펴냄)을 통해 기본소득이 인류의 미래를 걸 실질적 대안이라고 설파한다.

21세기 기본소득
21세기 기본소득

책은 기본소득이 어떻게 인류가 봉착한 위기를 기회로 바꿔 공상이 아닌 현실적인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지 작동 원리, 역사적 맥락, 윤리적 정당성, 실현 방안 등을 차근차근 설명해 나간다.

기본소득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지식을 바로잡고 반론을 논박하며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집약한다.

기본소득 연구가인 야니크 판데르보흐트 벨기에 브뤼셀 생루이대학 교수가 공동 집필했다.

저자들이 강조하는 기본소득은 '무조건적 기본소득'이다. 즉, 아무런 의무를 부과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개인 단위로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현금 소득이다.

이러한 무조건적 기본소득에 대한 아이디어는 18세기 말엽 유럽에서 확산하기 시작했다. 기본소득이란 용어는 1953년 영국 옥스퍼드대학 정치경제학자 조지 콜이 쓴 책에 처음 등장한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지금과 같은 의미로 표면 위로 떠오르기는 1980년대부터다.

저자들은 기본소득 핵심이 '무조건성'에 있다고 강조한다.

무조건성은 재산 조사로 극빈 상태임을 확인받거나 일정한 근로 의무를 지거나 사전에 납부금을 내야 하는 현행 조건부 복지제도들과 기본소득의 근본적인 차이다.

무조건적이라는 것은 빈부 구분 없이 부자들에게도 가난한 사람과 똑같은 수급권을 준다는 의미다. 그래서 재산 조사가 필요 없고 고용 여부도 따지지 않는다.

무조건적 기본소득의 최대 장점은 '복지 함정'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 복지제도는 재산 조사에 근거해 복지수당을 지급하기 때문에 일자리가 생기면 수급권을 박탈당한다. 이는 실업자들한테 불안한 일자리를 구하기보다 안정적으로 복지수당을 계속 타는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만듦으로써 절망적인 실업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반면 무조건적 기본소득은 돈벌이에 상관없이 수급권이 유지되기 때문에 일자리 제안을 쉽게 수락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실업의 함정에서 건져낸다.

반대로 무조건적 기본소득은 실업자들이 질 나쁜 일자리를 쉽게 거절할 수도 있게 함으로써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는 효과를 낳는다.

또한, 무조건적 기본소득은 무지, 수줍은, 모욕감 등 여러 이유로 일부 극빈층이 현행 조건부 복지수당을 받지 못하는 일을 방지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보편적 존엄성을 향상하고 사회적 빈곤을 줄이는 역할도 한다.

복지수당인 기본소득을 부자들에게까지 지급한다면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지급할 때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든다.

하지만 이 제도를 운용하는 데 드는 비용을 세금에서 조달해야 하는 점을 고려한다면, 모든 가정에서 똑같이 더 많은 세금을 내고 기본소득으로 돌려받는 결과여서 대부분 영향이 없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부의 재분배 효과가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업과 빈곤을 줄이는 기본소득 효과에 공감하면서도, 윤리적인 측면에서 기본소득에 반대하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일하지 않고 일할 의사조차 없는 사람에게까지 소득을 분배하는 것 자체가 노동을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믿는 우리의 상식과 도덕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일하지 않고 소득을 얻는 이들을 비난하며 사회적 생산에 기여하는 사람만 물질적 만족을 누릴 수 있다고 여기는 도덕률은, 기술적 진보로 잉여 노동자가 넘쳐나는 오늘날에는 폐기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술진보, 노동분업, 자본축적, 그리고 AI 덕분에 인구의 90%가 일을 해야 의식주를 충족시킬 수 있던 사회에서 벗어나 이제 인구의 10%만 일해도 충분한 사회가 됐기 때문이다.

실업자가 넘쳐나는 지금은 노동 자체가 하나의 특권이 됐다. 따라서 특권에서 배제된 다수를 과거처럼 나태하거나 무능하다고 비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제도를 악용하는 '무임승차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선, 정말로 걱정해야 할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돈만 받아가는 일부가 아니라, 필수적인 노동을 많이 하고서도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는 무수한 사람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들은 무조건적 기본소득이 인간의 보편적이고 실질적인 자유를 증진하는 도구라는 점을 강조한다.

"사람들을 악착같이 몰아붙여서 하기도 싫고 배우는 것도 없는 일자리에 묶어두는 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다. … 일자리, 교육, 돌봄, 자원봉사 등의 여러 활동 사이를 쉽게 이동하는 자유를, 더 많은 자원을 가진 이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가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공정한 일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더 현명한 일이다. 이렇게 기본소득이 제공하는 더 큰 경제적 안전과 바람직한 형태의 탄력성 확장은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기본소득은 비용이 아니라 투자인 것이다."

홍기빈 옮김. 644쪽. 2만8천원.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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