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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운명의 11월 9일…베를린 장벽붕괴·유대인학살·공화국 수립

송고시간2018-11-09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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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100주년·유대인 공격 '수정의 밤' 80주년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 [EPA=연합뉴스]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 [EPA=연합뉴스]

(베를린=연합뉴스) 이광빈 특파원 = 독일에서 11월 9일은 20세기 들어 '운명의 날'이었다.

100년 전 이날 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국 체제가 처음으로 들어섰다.

80년 전 이날은 나치의 유대인 공격 시발점이었다. 동서독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도 29년 전 이날 무너졌다.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날이었다.

1차 세계대전 패전에 따른 독일 제국의 붕괴와 민주국가의 수립, 민주공화국의 혼란을 틈탄 전체주의-나치의 발호, 독일의 2차 세계대전 패전에 따른 분단과 통일로 이어지는 주요 세계사적인 사건의 연결고리들이 이날 발생한 것이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은 이날 독일 의회에서 열린 공화국 선포 100주년 기념 연설에서 민주주의적 애국주의를 강조하면서 국가의 역사를 미화하려는 공격적인 민족주의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독일이 소수자를 배척하려는 이들을 반대해야 한다면서 극우성향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을 겨냥했다.

◇ 독일 혁명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탄생

1918년 11월. 4년을 넘긴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경제와 사회는 피폐해졌다. 패전의 그림자는 짙었다. 같은 달 3월에는 킬 항구에서 수병들이 전멸이 확실시되는 공격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노동자들도 가세했다. 혁명의 기운은 독일 구석구석으로 퍼졌다.

결국, 같은 달 전제 군주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면서 제국은 무너졌다. 막스 폰 바덴 총리가 사임하면서 사회민주당 지도자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했다. 에베르트는 독립사민당을 끌어들여 같은 달 9일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공화국 수립 후 이틀 후인 11일 휴전협정이 맺어지면서 1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과 정치구조는 이후 많은 국가에서 민주적인 정부 수립 시 바탕이 되기도 했다.

베를린 '크리스탈나흐트' 희생자 추모 행사 [EPA=연합뉴스]
베를린 '크리스탈나흐트' 희생자 추모 행사 [EPA=연합뉴스]

◇ 홀로코스트의 전조 '수정의 밤'

1938년 11월 9일은 '크리스탈나흐트(수정의 밤)'이라고 불린다.

같은 달 7일 독일계 유대인 헤르셸 그린슈판이 프랑스 파리의 독일 대사관의 외교관인 에른스트 폼 라트를 저격했다.

라트가 이틀 후인 9일 숨지자, 독일에선 반(反)유대주의 물결이 급속히 일어났다. 나치 당원들은 유대인의 주택과 상점을 공격했다. 하룻밤 사이에 유대인 상점 7천500여 개와 유대교 예배당 1천400여 곳이 공격을 당했다. 유대인 사망자만 최대 1천300명에 달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후 유대인 3만 명은 강제로 작센하우젠, 다하우, 부헨발트 등의 수용소에 갇혔다.

당시 유대인 상점의 깨진 유리가 길바닥에서 수정처럼 빛났다고 해서 '크리스탈나흐트'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크리스탈나흐트'는 최근 독일에서 반유대주의가 고개를 들면서 더 주목을 받고 있다. 옛 동독 지역의 켐니츠에서 지난 8월 말 극우세력의 대규모 폭력시위가 발생한 후 더욱 그렇다. 당시 켐니츠의 유대인 상점에 병과 돌이 날아들어 유리가 깨졌다. 80년 전의 악몽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 당국자의 실언으로 붕괴한 베를린 장벽

베를린 장벽은 1961년 8월 설치되기 시작했다. 그 후로 28년이 지난 1989년 11월 9일 동서독 분단의 상징은 무너졌다.

당시 동독 정부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동독 주민들을 달래기 위해 서독 방문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의 여행법 개정안을 9일 처리했다.

이어 공보담당 정치국원인 귄터 샤보프스키는 정례 기자회견에서 이를 설명하다가 실언을 했다.

새 여행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언제 발효되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당장"이라고 답했다. '서베를린 여행도 해당되느냐'는 질문에도 "물론"이라고 말했다. 이는 곧바로 서독 공영방송 ARD 방송의 8시 뉴스로 방영됐고, 이를 본 동베를린 시민 수만 명이 장벽으로 몰려갔다.

이에 압도된 경비병들은 장벽의 바리케이드를 치웠고, 시민들은 서베를린으로 넘어가고 베를린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이후 2주간 300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을 찾았고 동서독은 급격히 통일의 길로 접어들었다.

lkb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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