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컷] "일본군에 동원된 것도 억울한데 전범 멍에까지"
송고시간2018-01-17 10:00
(서울=연합뉴스) 전승엽 기자·박효연 인턴기자 = 광복 후 70년이 지났지만, 수많은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조선인이지만 전쟁 범죄인(전범)이 되었던, 조선인 전범들이 있는데요.
1942년, 일본은 불리한 전황 속에서 총동원 체제를 강화했고, 연합군 포로들의 감시를 위한 특수부대를 편성했습니다. 조선인 청년 3천106명은 부산의 임시군속교육대에서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은 뒤, 동남아시아 각지로 파견돼 포로감시원으로 일하게 됐습니다. 일본군의 명령 때문에 포로를 인솔,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던 그들은 뒤에서는 일본 부사관들에 의해서 끔찍한 폭행과 차별을 당했습니다.
포로들이 직접 접하는 것은 포로감시원이었기 때문에, 포로들에게는 증오와 원망의 시선을 받고, 일본군에게는 가혹한 학대를 받던 그들은 전쟁 이후, B,C급 전쟁 범죄인이 되었습니다. B,C급 전범은 특정 지역에서 일반적 전쟁 범죄를 저진 사람들로, 연합군 재판에서 B,C급 전범으로 판결을 받은 조선인은 148명이었습니다. 그 중, 23명은 사형당했으며, 125명은 최소 11년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148명 중 129명은 이등병보다 낮은 군무원의 역할인 포로감시원이었습니다.
연합군 재판에서 사형을 당한 일본인 A급 전범은 단 7명밖에 없었는데요. 재판관들의 대부분은 영국, 미국, 네덜란드 등의 식민지 종주국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식민지배 하에 끌려온 청년들의 사정을 전혀 이해하지 않았는데요.
"네가 명령에 안 따르면 총살할 것이다", "너희 집의 배급을 끊겠다"와 같은 협박 속에서 포로감시원의 대부분은 강제 징집되었습니다. 복역 후 그들의 삶은 여전히 평탄치 않았는데요. 일본에서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했으며, 한국에서는 '일제의 앞잡이'이라는 오명 속에서 고향을 마음대로 가지도 못했습니다. 차별과 멸시 속에서, 그들의 대부분은 지독한 가난과 환각 등의 정신병에 시달렸습니다. 심지어, 몇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1955년, 전범자와 유족들로 동진회를 결성했습니다. 50년 뒤인 2006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위원회'을 통해 한국정부로부터 전범이 아닌 강제동원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받았습니다. 일본 정부에게도 보상 입법화 운동을 진행해 현재까지도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는데요.
"일본은 포로에게는 정중히 사과했으면서, 포로 관리를 시키고 그 책임을 떠맡은 우리는 왜 방치 상태로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일본에 의해 잠시 쓰이고 버려졌습니다. 우리 문제는 한국과 일본 정부 간 교섭대상에서도 제외됐습니다. 실로 허무하고 비통한 심경을 떨칠 수 없습니다."(이학래, 동진회 회장)
현재 살아있는 조선인 전범 피해자는 단 3명입니다.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사과를 바라는 그들의 절규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조속히 기다립니다.
kir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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