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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앞에 선 5.18

작성자htkang1025

조회 228 18.08.29 11:13

※ 본 내용은 시스템 공학박사이신 지만원 선생님이 19,000페이지에 달하는 검찰 수사기록을 골무를 끼고 정리하여 작성한 저서 ‘솔로몬 앞에선 5.18’의 발췌 요약임

<머리말>

□ 1980년 당시 5.18광주시위는 적색불순분자들이 배후조종한 '반국가폭동'으로 인식되었고 당시의 법관들도 그렇게 판결했다. 하지만 그후 이 사회는 때 아닌 민주화라는 광란의 쓰나미를 맞는 불운을 당하게 되었다. 광란이 휩쓸고 간 사회는 예전과 단절된 딴 세상으로 변해 버렸다. 사회인식도 대법원판결도 모두 거꾸로 뒤집혔다.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이라는 흉측한 괴물이 탄생한 것이다. 이 괴물이 헌법에서 규정한 일사부재리 원칙과 형법불소급의 원칙을 능멸했다. 헌법이 불법으로 규정한 관심법까지 동원하여 5.18에 대한 정통역사관을 뒤집었다

o 이로써 예전의 '내란세력'이 '헌법수호세력'이 되었고, '내란'을 진압한 국가는 '헌법파괴세력'이 되었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김일성을 '위대한 수령 동지'로 모시는 용공세력은 충신세력이 되고, 반공세력은 역적세력으로 전락한 것이다.

□ 이 책은 다른 책과는 달리 사회적 및 국가적으로 엄청난 의무와 책임을 지는 역사책이다. 그리고 수백년전 역사의 한조각을 조명하는 식의 평범한 역사책이 아니라 살아있는 권력과 세도에 대항한 책이다

o 모두가 겁내하는 '5.18세력' 및 '민주화 세력'이 수십년동안 쌓아온 아성을 감히 파괴하려는 '당대의 역사'책인 것이다. 이 책을 쓸 때까지 필자는 5.18세력들과 광주의 공권력으로부터 폭력과 린치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등 수많은 수난과 수모를 당해왔고, 지금도 당하고 있다. 세도 편에 서 있는 당대의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이다.

<5.18, 북한의 역사인가 남한의 역사인가?>

□ 2010년 5월 17일 연합뉴스는 5.18 30주년을 맞아 평양에서 '광주인민봉기 30돌 기념 평양시 보고회'가 열렸다고 보도

□ 통일부의 '주간 북한동향 보고서'

o 북한은 매년 5월 18일이 다가오면 당정 최고 간부들이 총 동원되고 주요 언론들이 총 동원되어 여러날에 걸쳐 북한 전지역에서 5.18추모 행사 개최

o 북한은 '5.18민주화운동' 12주년을 맞아 평양시를 필두로 각지에서 군중집회를 개최하는 한편, 신문방송 및 한민전 중앙위 명의의 '5월투쟁선언'등을 통하여 '과감한 반미-반파쇼 구국투쟁의 포문을 열라'는 등 연일 반미.반정부 투쟁을 극렬히 선동하고 있으며 '북한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인민봉기'라고 규정하여 매년 '평양시 군중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우리 국내 재야-운동권등에 대한 반미.반정부투쟁 선동의 계기로 활용

□ 북한에서 최고인 모든 것에는 5.18 칭호가 부여

o 북한에서 가장 큰 1만톤 프레스에 '5.18청년호'라고 호칭(북한의 평양 룡성기계공장에서

만들었는데 5.18을 기리기 위하여 김정일이 직접 호칭 부여)하고 '5.18무사고정시견인초과운동(천리마운동의 일환)'등 북한 최고의 것에 5.18의 명칭을 명예와 영광의 상징으로 부여

(이외에 탈북자들의 증언집에 의하면 상징성있는 전차에도 '5.18전진호', '5.18소년호 땅크, 일잘하는 생산직장에도 '영예의 5.18청년직장', '5.18식품가공공장', '5.18고치청년작업반, '5.18청년제철소'의 호칭을 부여) - 북한은 전 당과 전 국가, 전 국민적으로 5.18의 정당성과 계승성을 광범위하게 선전하고 대중사회에 의식화

□ 1989 ~ 1991년에 걸쳐 북한 5.18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 제작에 황oo씨가 시나리오를 썼고 윤oo씨가 배경음악('임을 위한 행진곡'등)을 작곡 - 이 두 사람에게 김일성은 '재간둥이'라는 별호를 내림

o 또한 윤oo씨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평양에 대지 5,150평, 15층 규모의 기와집으로 '윤oo음악당'을 지어주었고 황oo씨에게는 시나리오를 만들어준 대가로 25만달러의 상금을 수여

□ 5.18 당시 3공수 대대장이었던 박oo 중령은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대형버스를 돌진시킨 운전수를 붙잡아 왜 이런일을 저지르느냐고 물었는데, 그 운전수는 술에 잔뜩 취해 있었으며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인다 협박해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 가지라 생각하여 할 수 없이 했다"고 대답했다.

o 주머니를 뒤지니 흰색가루 봉지가 나왔으며 이를 군의관에 확인해 보니 환각제였다고 한다(공수부대원들이 환각제를 복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검찰이 확인해주었다 - 이처럼 북한은 환각제를 자기들이 사용해놓고 공수부대에게 뒤집어 씌운 것임)

□ 1982년 3월 20일 북한의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이라는 단행본에 북한이 남한에서 수행했다는 대남역사 목록(총 27건)중 '광주인민들의 영웅적 봉기'와 '광주민중봉기 후 민주와 통일을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투쟁'등이 들어 있는데

o 이 모두가 김일성의 위대한 교시로 수행되었으며, 김일성이 남조선에서 발생한 불만의 틈새를 적시에 이용하여 전략과 전술을 개발하고 이를 교시로 내려주면 남조선에 있는 혁명세력과 민중세력이 죽음을 무릅쓰고 폭동과 반란을 수행했다는 것임

o 이 책은 5.18이 이들 '주체의 기치에 따라 남조선 애국인민들이 일으킨 반파쇼(반대한민국) 투쟁' 중에서 가장 성공한 인민혁명사건이라고 표현

⇒ 상기 몇가지의 객관적인 자료만 보아도 5.18에 대한 집념과 열기는 북한에서 더욱 대단(5.18에 대한 북한의 소유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5.18의 명예는 5.18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일치할 때와 순수한 민주화 운동으로 남아 있을 때에만 유지되는 것임. 상기 사실을 감안할 때 많은 사람들이 5.18에 철저히 기만 당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임

<거짓 위에 세워진 5.18 누각>

□ 황oo은 5.18의 원전으로 불리는 '광주 민주항쟁의 기록'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첫날부터 환각제를 마시고 한 손에는 대검을, 다른 손에는 곤봉을 잡고 다른 손에는 곤봉을 잡고 닥치는 대로 호박 찌르듯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상도 군인들만 뽑아서 전라도 사람 70%를 죽이러 왔다고도 했다. 광주에서 사살된 시민이 2,000여명이라고 했음

⇒ 진실이 담긴 검찰보고서*는 2004년말까지 창고에 꼭꼭 갇혀 있었는바, 1995년 7월 18일 역사바로세우기재판에서 검찰이 내놓은 수사결과는 이와는 반대였음

* 전남대에 파견된 공수부대는 전북 금마에 있던 7공수여단의 1개대대(220여명 정도)였고 그 40%가 호남출신들로 구성되었음** 검찰은 시민사망자는 166명이며 이중 12명은 대한민국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은 신원불상자라고 밝힘. 또한 검찰은 헬기에 의한 기총사격은 없었고 화염방사기도 사용된바 없으며 환각제 사용은 없었고 대량 암매장 사건같은 것은 일절 없었다고 못을 박았음

** 5.18측은 계엄당국이 광주가 미워 가장 많은 공수부대를 파견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계엄사령관은 광주에는 달랑 2개대대만 보냈는바, 1개대대(제33대대)는 전남대에, 1개대대(제35대대)는 조선대에 파견되었음

5월 18일, 대부분의 공수부대는 서울에 있었음. 예컨대 고대에는 4개대대, 동국대에는 3개대대, 성대에는 2개대대가 파견되어 있었음

□ 미 헤리티지재단 아시아 연구센터가 1985년 9월 16일자로 발행한 '남한의 광주사건 재조명'이라는 보고서를 냈는데 한국정부의 편도 아니요 광주시민들의 편도 아닌 객관적인 위치에서 조사했고, 이 조사 내용의 맥은 수사기록들과 정확히 일치

o 폭력사태가 악화된 데는 지역감정이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이는 데 전라도 도민들은 수백년동안 중앙정권에 의해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경상도 사람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전라도를 차별하고 경상도에만 혜택을 주었다고 말한다. 이어서 격돌이 발생한 것은 김대중 대통령을 체포(5월 15일 10만 이상이 모인 서울역 집회 이후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재야세력들은 5월 22일을 기해 전국 봉기를 일으켜 국가를 전복시키겠다는 선전포고를 공개적으로 하였음)하는 등 계엄확대가 처음부터 전라도를 표적으로 한 조치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o 소요 첫날부터 루머가 돌았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을 죽이러 왔다는 것이다. 첫날에는 사망자가 전혀 없었지만 이날 소문은 40명이 죽었다고 했으며 김대중 대통령이 처형됐다는 소문도 돌았음. 해괴한 소문에는 군인들에게 밥을 며칠간 굶기고 마약을 투여하여 군인을 흥분시켰다는 내용도 있었는데 시민들은 이 뜬소문을 믿고 시위에 동참했음

o 사상자가 발생한 원인은 군인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상대로 무차별 난사한 것에 의해 일방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쌍방의 중무장한 무력집단간의 격돌이 초래한 필연적인 결과였음

o 광주교도소(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자수가 2,700명이었음)에는 50명이상이 죽었는데 이는 중무장한 폭도들이 정부군이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는 광주교도소를 수차 강습하면서 이어진 공방전에서 사살된 것임. 정부가 사망자 191명, 부상자 852명(중상자 122명)이었다고 발표하자 많은 사람들은 웃기는 자료라 하면서 믿지 않았다. 이 불신은 일부 외신보도와 반정부 인사들의 언동에 기인한다. 어떤 외신은 적어도 1,000명은 죽었다고 잘라 말했고 어떤 이는 2,000명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o 계엄군은 탈환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인명과 재산에 대한 피해를 극소화하기 위하여 치밀한 계획을 수립했고 행동했는바, 공중정찰에 의한 사진뿐만 아니라 광주시내에 있는 정보제공자들을 활용함으로써 반란 시민들의 본거지와 거점들을 하나하나 정확히 확인했음. 그리고 5월 27일, 시민들이 잠든 새벽1시에 계엄군들은 행동을 개시했음. 병력을 소부대단위로 편성하고 정밀조준으로 목표에 타격을 가했다. 작전은 수 시간 이내에 완료되었고 사살된 사람은 17명에 불과했음

□ 한풀이 측면과 관련하여 황oo 저 '광주 5월 민중항쟁의 기록'에는 '전라도에는 동학농민전쟁에서 의병으로 또한 광주학생반체제운동등으로 이어지는 민중운동의 전통과 맥락이 혈연적으로 실존하고 있었다......박정희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이루어진 매판정책 추진과 불균등개발로 인하여 호남푸대접이라는 광범위한 대중적 불만의식이 만연했다.....가난하고 불우한 집에서 법관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내 고장에서도 인물이 하나 나와야 한다는 민중적 열망이 간절하던 차에 전남의 대중적인 영웅인 김대중씨가 대통령에 출마하여 좌절당하고 고난을 받은 데 대한 반작용이 있었다'는 내용이 있음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에 대한 문제의 제기>

□ 기록은 1980년이나 1997년이나 똑 같은데 판사들의 판결만 달라

o 1997년 4월 대법원이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의 판결문을 내놓으면서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굳어져 왔는데, 5.18역사에 내재한 가장 큰 약점은 1980년의 검찰이 파악한 사건 사실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데 이 똑같은 사건 사실을 놓고 판단하는 판사들이 시대에 따라, 권력에 따라 해석을 달리한 것임

o 1980년의 판사들은 북한의 개입과 불순분자들의 국가파괴행위에 초점을 둔 반면, 1997년에는 판사들이 반공세력을 역적세력으로 몰고 갔음

□ 5.18 통계의 문제점

o 수사기록상 10일간 벌어진 충돌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193명(민간사망자 154명,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신원불상 사망자 12명, 군사망자 23명, 경찰사망자 4명)이고 이외에도 47명의 행불자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음

o 부상자통계를 보면 민간부상자 377명, 군인부상자 117명, 경찰부상자 148명으로 민간 대 군경 비율이 1.4 : 1임

o 사망한 '민간 및 신원불상자' 166명중 총상으로 사망한 사람은 116명, 이 중 계엄군이 보유한 M-16소총으로 사망한 사람은 36명뿐이고 나머지 80명(총상 사망자의 69%)은 카빈, M-1, AR자동소총, LMG, 공기소총등 무기고에서 탈취된 총들에 의해 사망하였음(M-16소총은 계엄군만이 가지고 있었으며 M-16소총 총탄이 인체에 남긴 탄흔은 매우 독특하다, 탄흔의 입구는 아주 작고 출구는 나팔꽃처럼 넓기 때문에 다른 총들 사이에는 서로 혼돈될 수는 있어도 M-16소총의 탄흔 만큼은 혼돈 될 수 없다)

⇒ 결론적으로 이 80명 이라는 통계는 계엄군이 아닌 다른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임

⇒ 당시 광주시민도 모르고 국가정보기관들도 모르게 침투한 북한 특수군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할 것임(아니면 광주 시민이 다른 광주 시민을 쏘았을 수 있다는 패륜적 추측에 대한 반증을 보여야 할 것임). 또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관들은 수사기록에 엄연히 존재하는 이 엄청난 기록에 왜 눈을 감았는지 대답하여야 할 것임

<5.18관련 역사들에 대한 요약정리>

□ 10.26사건

o 1979년 10월 26일, 오후 4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을 마치고 헬기로 돌아오는 도중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궁정동 안가에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라고 연락. 이때 김재규는 평소 마음먹었던 혁명을 하기 위하여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를 궁정동에 불러 대기케 했다. 자기는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할 권총을 준비하고 수하의 두 대령들에게는 권총소리가 나면 경호원들을 사살하라고 지시. 만찬시간 1시간 40분 만에 김재규는 차지철과 대통령을 살해

o 김계원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시신을 국군병원에 옮겨 놓고 군의관으로부터 대통령이 확실하게 서거했음을 확인하고 청와대로 들어거 비상소집을 했다. 8시 40분, 최규하 총리는 김계원으로부터 김재규가 차지철과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도 총리는 이를 함구하면서 김재규가 원하는 대로 각료들을 국방부로 이끌고 가서 비상국무회의를 열고 익일 아침 4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할 것과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할 것을 결정한 후 곧바로 회의장 밖에 있는 김재규에게 가서 이 사실을 귀띔까지 해주었음

o 한편, 김재규는 시해후에 피범벅이 되어 가지고 맨발과 와이셔츠 바람으로 불과 50m 거리에 있는 정승화에게 달려가 큰일났다며 그를 자기 차에 태우고 육군 B2 벙커로 갔고, 벙커에 도착한 정승화는 국방장관을 제치고 장관의 소관사항인 병력을 동원하는 명령을 내리고 차지철만이 지휘할 수 있는 경호실 차장을 월권적으로 지휘하여 경호병력을 현장으로 가지 못하도록 동결하는 명령을 내렸고, 현장 접근을 확실히 저지하기 위하여 또 다른 차지철의 부하, 차지철만이 지휘할 수 있는 수경사령관을 월권적으로 지휘하여 청와대를 포위토록 지시. 벙커에 온 김계원 비서실장은 노재현 국방부장관과 정승화가 있는 자리에서 김재규가 범행에 사용하였던 권총을 내 놓으며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정승화는 노재현 장관으로부터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명을 받고서도 그를 비호했다. 하지만 신군부측의 순발력에 의해 김재규는 곧바로 서빙고 분실로 연행되었고, 거기에서 김재규는 자기가 범인이고 정승화와 함께 행동했다는 사실을 실토

□ 12.12사건

o 1979년 12월 12일은 정승화가 요란히 저항을 하다가 체포된 날이다. 오후 6시 30분 신군부측에서 최규하 대통령에 가서 정승화 연행에 대한 재가를 요청했다. 당시는 정승화에 대한 의혹이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있었고, 이러한 것은 극비사항이기 때문에 곧바로 대통령에게 가져간 것이다. 신군부측은 재가가 쉽게 나리라 생각하고 무조건 7시에 정승화를 체포하라는 사전각본을 짰다. 그런데 의외에도 대통령은 국방장관을 앉힌 자리에서만 재가를 해 주겠다고 고집했다. 그런데 정승화를 체포하는 일은 원체 큰일이라 신군부측은 여론을 이끌수 있는 9명의 장군을 보안사 정문 맞은편에 있는 수경사 30단으로 초청하여 재가가 끝나는 대로 체포의 당위성에 대해 설명하려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승화와 가까운 장태완, 정병주(특전사령관), 김진기(헌병감)에게도 따로 설명해줄 요량으로 신촌만찬을 준비했다.

o 신군부측은 7시 5분에 정승화 총장 공관으로 갔다. 서빙고로 가자는 권고를 받은 정승화는 순순히 응하기 않고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고, 이로 인해 그의 부하들과 수사관들 사이에 총격전이 유발됐고 그의 부하들과 범죄수사대 대령이 하반신 불수의 중상을 입었다. 그 자신이 한 때 보안부대장을 역임했기에 저항해 봐야 피해만 발생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을 터인데도 불필요한 저항을 하다가 부하들을 다치게 한 것이다. 결국 수사관이 응접실의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M-16소총으로 위협하고서야 순순히 체포에 응했다.

o 한편, 노재현 국방장관은 위의 총소리를 듣고 교통체증을 뚫어가면서 부인을 여의도 소재 부하 집에다 태워다 놓은 후 피신만 반복하고 다녔다. 대통령으로부터 빨리 들어오라는 호출명령을 여러차례 받고도 응하지 않았다. 피해 다니는 동안 군에는 지휘공백이 발생하여 정승화 군벌과 30단 군벌 사이에 불필요한 긴장이 유발됐다. 긴장이 일자 불길한 생각이 든 5명의 장군은 밤 9시 30분에 대통령에 가서 정중히 인사를 하고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하면서 재가를 빨리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대통령은 급한 게 없었다. "장관 오면 해줄게"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3군사령관 이건영,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총장 권한 대행인 윤성민 참모차장 등 수도권 실세들이 나서서 30단에 모인 장군들을 무조건 반란군이라 규정하면서 병력을 동원하고, 30단과 청와대 지역을 전차포와 야포로 융단공격하려 하고, 상대방 장교들을 체포 구금함은 물론 장교들의 이름을 지정하여 사살명령까지 내리고, 대통령을 납치 협박하여 정승화를 구하고, 무장헬기로 정승화를 구출하자는 막다른 단계에까지 이르다가 신군부측에 의해 진압되고 체포되기에 이르렀음

o 이리저리 숨어만 다니면서 대통령의 호출에 불응한 노재현 장관을 대통령과 함께 기다리며 밤을 새운 신현확 총리는 직접 국방부에 가서 장관을 발견하였으며, 총리는 국방장관, 이희성 대장, 국방부 차관 김용휴를 태우고 총리공관으로 갔다. 노재현은 보안사에 들러 재가문서를 달라고 하여 스스로 결재를 한 후 대통령에게 가서 꾸중을 듣고 재가를 받은 후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대장을 임명해 줄 것을 건의했다. 04시 30분부터 05시 10분 사이였다. 대통령은 서명란에 05:10분이라 쓰고 서명을 했다.

□ 5.17사건

o 10.26이후의 권력공백기를 맞이하여 북한의 남침우려가 부각되었는바, 실제로 김일성은 11월 3호 청사에서 남한에 전민봉기를 유도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고, 12월 20일에 인민무력부가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가동하라는 명령을 내렸음

- 4월 21일, 사북탄광 노동폭력사태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노동자를 포함한 전 계급이 들고 일어나 전민봉기를 일으키라고 간첩들에 지시했음

□ 1980년 3월부터 5.18 직전까지 색출한 간첩사건만 7건, 남침징후 첩보 5건에 이어 5월 10일에는 일본내각으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정보까지 입수되어 정부와 군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음

□ 이러한 위기의 계절에 안보를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 재야세력이 말하는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이 하였다. 김종필은 공화당, 김영삼은 신민당을 이끌고 있었지만 김대중은 학생세력과 노동자세력을 이끌어 온 재야세력을 결집시켜 '국민연합'이라는 사실상의 혁명지휘부를 결성

□ 4월 하순부터 시작된 대학생 시위는 5월에 접어들면서 전국규모로 확산되었고 이에 고무된 김대중은 5월 7일, 제1차 민주화촉진 국민선언문을 발표하여 최규하 정부의 즉각퇴진과 전국내각구성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며 정부를 압박

□ 5월 15일의 시위는 서울역에 10만 시위대가 모여 버스로 경찰을 깔아죽이는 정도에 이르렀고, 당시 내무부장관은 소요진압이 경찰의 범위를 넘는다며 계엄군의 개입을 요청

□ 한편 서울역 시위에 극도로 고무된 김대중은 5월 16일, 제2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 - 5월 22일을 기해 국가를 전복하겠다는 최후통첩이었던 것임

o 경찰을 포함한 전국의 모든 국민들을 향해서 5월 22일을 기해 검은 리본을 달고 전국적으로 봉기하여 정부를 전복할 것을 선동했고, 군인들을 향해서는 명령에 복종하지 말 것을 선동

o 정부가 전복되고 국가가 혼란에 빠져 남침조건을 마련토록 해 줄 것인가, 아니면 김대중이 이끄는 재야세력을 물리칠 것인가에 대해 최규하 정부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함

o 이러한 위기를 맞이한 정부의 선택이 바로 5.17조치였다. 5월 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긴급히 소집하고, 10.26이후 선포되었던 지역비상계엄(제주도 제외)을 전국계엄으로 확대

⇒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전국은 무법천지가 되었을 것이고 북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북한군은 제2의 6.25남침을 했을 것임

<무기고 탈취에 대한 북한의 역할>

□ 무기를 동시탈취한 것은 5.18 오래 이전에 무기고 위치를 파악하였으며 지휘부(북한 특수군)가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함

o 탈북자들은 북한 특수군의 지휘로 고정간첩들이 총동원 되어 3개월 동안 전남지역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다고 증언

o 1980년 5월 21일 12시부터 16시까지 4시간에 걸쳐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있는 38개 무기고에서 5,403정의 총기(카빈, M-1, 기관총), 탄약 288,680발, 수류탄 270발을, TNT 10여 상자 폭약 2,500 상자, 뇌관 35만개, 도화선 4만여m등을 동시다발적으로 탈취

- 또한 779대의 차량이 탈취되었는데 이들 779대는 계엄군으로부터 탈취한 군용차 34대, 경찰차 50대, 아시아자동차 군용트럭 328대, 일반차 367대로 이러한 노획은 순수한 시민들에게 어울릴 수 없는 기적의 수치임

- 아시아자동차공장만으로는 600명(300명은 20사단이동경로에 관한 극비사항을 입수하여 이를 기습하여 14대의 지프차를 탈취하여 9시에 동 공장에 집결 + 300명은 5대의 대형버스에 타고 동 공장에 9시에 집결)이 4대의 장갑차와 군용트럭 및 일반차 370여대 등을 탈취

o 이어 조를 짜서 17개 시․군에 꼭꼭 숨어있는 38개 무기고를 향해 질주. 수사기록을 보나 '북한의 5.18역사책'을 보나 5월 21일의 무기탈취는 600명이 담당

⇒ 38개 무기고를 불과 몇 시간만에 모두 털었다는 것은 누군가가 38개 무기로 위치를 사전에 파악하여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무기고 약도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는 의미가 됨

o 38개 무기고 위치파악은 북한 특수군이나 간첩같은 고도의 전문가들이 몇 개월 단위의 기간에 걸쳐 해낼 수 있는 일이지 결코 일반시민이 짧은 시간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님

⇒ 그렇다면 5.18은 공수부대의 폭력에 맞서 일어난 즉흥적인 저항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되어 왔다는 것이 되며 그것도 광주시민이 아닌 북한 간첩들에 의해 준비되어 왔다는 것으로 추정되는바, 그렇다면 5.18은 북한의 역사가 되는 것임(만일 이 사전준비를 광주시민이 주도 했다면 5.18의 민주항쟁으로서의 가치가 퇴색될 것임)

<대한민국 사람이 아닌 시체가 12명, 이들이 어째서 북한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 5.18묘지에 묻힌 12명은 행불자 집안의 자식도 아닌바, 이들 시체는 아직도 주인없이 누워있으며 대한민국 국민도 아님 - 얼굴은 같은 민족인데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면 이는 북한사람일 것이라는 것이 세상의 상식일 것임

□ 현재 북한 함경북도 소재 청진시 천마루에는 대남작전에 참가하였다가 사망한 전투영웅들의 묘지가 있는데 5.18 광주사태 당시에 남조선에 나갔다가 죽은 공화국 영웅들의 묘지가 대부분임

⇒ 비문에는 '여기에 누워있는 동지들은 1980년 5월, 남조선에 파견되어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해서 영웅적으로 싸우다가 산화하였다' 하는 식으로 내용이 적혀 있음

<광주시위대가 준헌법기관이라는 판결>

□ 1980년의 재판부는 5.18이 국가를 전복하기 위한 폭동이요 김대중의 내란음모라고 판결한 반면, 1996 ~ 97년의 재판부는 5.18시위대를 준헌법기관으로 정의했음. 광주시위대는 헌법을 지키려 한 사실상의 준헌법기관이기 때문에 국가는 시위대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도록 도와 주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군부가 최규하 대통령을 허수아비로 만들면서 이를 조기 진압한 것은 분명한 내란행위였다고 판결한 것임

o 5.17 비상계엄전국확대 조치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국민에 겁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넓은 의미의 폭동이라는 기상천외한 판결을 내림. 계엄 자체가 불법이면 계엄법은 왜 존재하는가? 신군부의 마음속에 내란하려는 마음(관심법-여론법)이 있었기 때문에 5.17은 내란을 위한 폭동이 되는 것이라는 우격다짐의 판결을 했음

⇒ 역사의 대상에는 금기가 없다 정치의 산물인 특별법 제정도 역사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재판부의 판결문도 역사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은 그 자체가 역사의 연구대상이지, 역사의 저자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함

□ 상식을 가지고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광주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될 경우 이 나라는 그 당시 적화통일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할 것임

<체계적인 작전은 있었지만 광주사람들로 형성된 지휘부는 없었음>

□ 황oo씨는 '광주 5.18민중항쟁기록'에서 "지하에 투쟁지도부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했다"고 썼다.

□ 광주시위의 과열성은 5월 19일 밤부터 5월 21일 오후 5시까지에 절정을 이루었음. 광범위하게 널려진 파출소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파괴, 방화하였으며 불타는 휘발유 드럼통을 정렬해 있는 계엄군을 향해 굴리고, 장갑차, 군용차, 대형화물차, 버스를 기발한 방법들로 계엄군을 향해 돌진시켰는데 이러한 공격들은 총알보다 더 공포스러운 살인공격이었음 - 그런데 이런 과정을 지휘한 지도부가 기록에는 없는바, 이러한 체계적인 공격들이 과연 지도부 없이 시민들이 알아서 한 행동일까? 아니면 북한 특수군이나 간첩이 개입한 것으로 밖에 없음

□ 광주시에는 5월 22일에야 비로소 광주유지들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라는 것이 등장하여 무기회수를 주도하였으며, 이후 3일간 무기반납 문제를 놓고 학생간에 온건파와 강경파간의 대립이 연속 되었는바 강경파가 득세하면서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시민군 지휘부가 되었음. - 시민군 지휘부는 5월 25일에야 비로소 탄생한 것임

⇒ 그 이전의 작전을 지휘한 지휘부는 없었음. 지휘부가 없는 상황에서 20사단 지휘부를 공격하고 계엄군을 광주시에서 몰아내고, 44개 무기고(38개 무기고는 남한자료에 수록되어 있고 이에 더해 6개의 무기고 이름이 북한자료에 추가되어 있음)를 털어 2개 연대분에 해당하는 무기를 순식간에 탈취하는 정도의 체계적인 전투들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졌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북한 특수군이나 간첩이 개입했다는 강한 의구심을 낳게 한다

<5.18의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

□ 탈북자들의 무더기 양심선언

o 5.18광주폭동에서 저질러진 살인만행들이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에 의해서 고의적으로 만들어진 내용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놀라움과 함께 경악을 금할 수 없었음. 아무리 통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런 야만적인 살인극을 벌이며 남조선 인민들을 이간질시키고 순진한 사람들을 죽게 만들 수가 있었는지 한 평생 북한체제에서 세뇌된 머리지만 상상할 수가 없었음

o 5.18공화국 영웅이 영화에서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끄집어내는 장면은 북한 특전사가 한 짓이라고 실토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자 그는 그래야만 시민의 격분을 이끌어내고 과격한 행동으로 유도할 수 있다고 언급

o 광주지역 근처에 있는 감옥소 기습공격시 북한전투요원이 중상을 입고 병원에 들려갔는데 환자가 누워있는 북한전투요원을 방향을 바꿔가면서 30대 중반의 한 남조선의 여자가 촬영을 하였음. 다른 북한전투요원과 눈길이 마주치자 여자가 그 자리를 떠났는데 북한 전투요원에게 잡혀 광주시내 모처로 납치되어 갔고 저항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잔인하게 살해되었음

o "쌍간나 새끼, 괴뢰군 새끼들 몰려오는데 총 안잡고 머하고 서 있니?" 총을 넘겨받을 생각도 안하고 자기 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여성이 그에게 "아저씨 광주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어요?" 순간 그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고 했다.... 여자는 그가 아무래도 수상해 보였던지 총을 받지 않고 이내 골목쪽으로 줄행랑을 치듯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어떤 집에 들어가서 한 남자에게 "오늘 복면을 한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명 아니고 외지에서 온 사람들 같아 보였어요"라고 대화를 하였는데 쫓아온 남자가 위협을 느껴 담장을 너머 도망가려하는 남자를 총탄 한발을 쏘아 떨어뜨렸으며, 파랗게 질려있는 여성의 가슴에 총탄 두발을 날림

o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전국적으로 광주인민항쟁의 여파가 퍼져나가게 만드는 것이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임무였지만 생각처럼 사건이 번지지 않자 북한에서는 현장에 파견된 특수부대 요원들에게 될수록 정체를 노출시키지 말고 주도적으로 폭동을 유도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고 하였다. 북한으로부터 새로운 지시가 떨어지면서 특수작전요원들은 시민군들 속에 위장 침투하여 본격적인 살인, 파괴활동을 조작하면서 광주시민을 자극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광주인민봉기에서 죽은 사람들중에 실제로 진압군에 맞아 죽은 사람은 얼마되지 않고 많은 시민들은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요원들에 의해서 무참하게 죽었다고 공화국 영웅의 말을 빌어서 친구는 말했다.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원들의 정체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눈치를 채거나 이상한 기미를 보이기만 하면 그들은 두말없이 즉석에서 시체가 되어 처리되었다고 하였음. 또한 북한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르지 않거나 그들의 요구에 불응해서 도망가면 그 사람들 역시도 절대로 살려주지 않았다는 것임

<4대 유언비어의 발상지는 북한>

□ 광주에는 악성 유언비어들이 만연했다. '공수부대원에게 환각제를 먹였다', '여학생을 발가 벗긴 채 세워놓고 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임산부의 배를 찔러 태아를 꺼냈다', '공수부대가 광주시민 70%는 죽여도 좋다는 구호를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음

o 이러한 끔찍한 유언비어들에 해당하는 동영상과 영화가 북한에서 방송되고 상영('님을 위한 교향시'에도 들어 있듯이 이러한 동영상은 남한에는 없고 북한에서만 방영됨)되었는데, 이는 북한특수군이 광주의 어느 후미진 곳들에서 이러한 만행을 저지르면서 동영상을 찍어 올려보낸 반면, 광주에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것을 의미할 것임

o 광주봉기는 북한이 계획적으로 남조선을 전복하고 친북정권을 세우기 위해 북한에 의해 저질러졌으며, 북한은 살인기계로 길러진 특수부대들을 대거 내려보내 시민들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때려죽이고, 찔러 죽여놓고, 이를 계엄군의 소행으로 인식하도록 함으로써 계엄군에 대한 광주민중의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음

⇒ 북한은 가장 자극적인 방법으로 광주시민들을 흥분시키고 그 힘으로 당시의 한국정부를 전복시키고 제2의 남침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심리전 작업을 했음

□ 5.18봉기가 일어난 다음날부터 북한의 TV에서는 다른 것은 방송하지 않고 매일 광주봉기에 대해서만 중대방송을 하였다. 처음에는 남조선의 애국적인 청년들과 소위 혁명적인 인민들이 남조선의 민주화와 조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전 인민적으로 항쟁을 궐기 했다고 선전했다. 그리고 보기에도 끔찍한 장면들만 골라서 연속적으로 방영하였는데, 어디가 출처가 되어 말이 나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부터 사람들 속에는 북한의 특수부대가 광주현장에 나가서 활동하고 있으며 조국통일은 곧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나갔음

□ 북한은 강력한 특수전부대들을 비밀리에 침투시켜서 남조선의 배후를 교란하는 한편 남한 인민들을 끌어 당기기 위한 새로운 선전 시나리오를 만드는 것을 잊지 않았음. 북한은 그와 같은 대남전략단계에서 만들어진 광주사태의 비극을 현장에서 별도로 촬영하여 실지 남조선 계엄군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건이라고 속여서 북한의 TV에서 매일 보도하였음

<광주의 북한 상황실 및 지휘통제>

□ 북한의 5.18역사책 '광주의 분노'에는 광주의 상황이 일자별로 요약되어 있는데, 이는 한국의 검찰보고서와도 대체로 일치하지만, 일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경찰, 군, 국정원, 검찰보고서 보다 훨씬 더 상세하고 구체적임

o 카톨릭센터에 계엄군 통신지휘소가 있다는 것을 알고 격렬한 싸움이 일어났는데 동 센터에 계엄군 통신지휘소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북한이 알고 있는 것인지, 북한군의 개입이 없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로 사료됨

o 수사기록보다 더 훌륭하게 작성된 북한자료! 이런 자료를 광주시민들이 작성하여 북한 당국에 보냈다고는 생각되지 않음. 5.18광주에 수많은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상황을 이 처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는 것은 결국 광주에 북한군 상황실이 있었다고 밖에 달리 해석할 수가 없음

□ 1982년에 발간된 대남공작 역사책에 '오후 3시부터 봉기자들은 공격서열을 편성하였다. 봉기군중은 승용차 4대에 불을 달아 저지선을 향하여 밀어 보냈으며.....' - 공격서열을 편성했다는 말은 군사용어이며 이는 수많은 단위의 시위대들에 공격목표를 배당해 주었다는 뜻임

o 이 공격서열이라는 용어는 수사기록 어디에도 없다. 단순한 시위에는 공격서열이 있을 수 없고, 광주시민들은 수많은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인 시위를 기획하여 계엄군을 압박할 수 있을 정도의 기획능력이 없다. 북한집단이 내려와 기획하고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수많은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묘사하고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이며, 각 상황에 대한 전술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고 수많은 시위대들에 공격목표를 정해주고, 주공과 조공이 명시된 공격서열을 정해줄 수 있었던 것임

<5.18은 북한이 기획 연출>

□ 1982년 '조국통일사'가 발행한 대남공작 역사책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에 기록되어 있는 북한의 대남시위전략은 '① 주력시위(주공)는 시내 중심부에서 벌어야 한다. ② 이를 돕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성토대회, 성명발표, 교내시위, 농성투쟁 등을 하여 중단없는 공격을 실시해야 한다. ③ 모든 시위대들은 집중과 통일된 행동을 통해 정치적인 효과를 높여야 한다. 우선 시위구호와 주장이 같아야 한다.'라고 되어 있음

□ 북한의 대남시위전술에는 '돌파', '제 역량의 배합', '역포위', '속도전', '주위선동'이라는 군사용어가 나오며 전략, 전술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배합전'이며 이 전술이 남한시위에서도 응용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임

□ 남한의 시위에 이런 높은 수준의 전술이 응용되었다는 것은 북한 전문가들이 시위에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것을 믿게 함.

⇒ 1980년 5월의 시위들이 그냥 산발적으로 발생한 시위가 아니라 시위전략과 전술을 통달한 검은 '시위작전사령부'의 일사불란한 지휘(계획, 명령, 상황파악)하에 이루어진 작전이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매우 중요한 대목임

□ 북한의 대남공작 역사책에 실린 '광주 반파쇼민주화투쟁에 대한 3가지 교훈'은 ① 남조선인민의 해방투쟁 승리는 반미투쟁과 결합될 때에만 확고한 것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 ② 남조선 인민들의 해방투쟁 승리를 위해서는 청년학생운동과 로동운동과의 결합을 새로운 높은 단계로 심화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임, ③ 남조선 인민의 해방투쟁 승리를 위해서는 보다 광범위한 대중적 지반위에서 반파쇼 민주역량을 형성하고 그것을 조직화하여야 한다는 것임

⇒ 5.18시위에 관한 시위 전략이 있고 시위 전술이 있고 사후평가를 한 집단은 남한이 아니라 북한인바, 5.18작전지휘를 북한군이 와서 수행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임

□ 5.18을 북한이 기획 실천했다는 데 대한 탈북자들의 무더기 증언들

o 당시 북한에서 나간 특수부대들이 중심이 되어 광주인민봉기를 물밑에서 조종했다고 말했다. 또한 광주봉기를 성공시켜 가지고 서울로 진격할 예정이었다는 말도 했음

o 5.18광주인민봉기 때 북한 중앙 TV에서는 매일 끔찍한 영상물들을 상영하였는데 이때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사람들과 얼굴을 가린 사람들은 모두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음

o TV에서 보았다. 친구 한명이 손에 기관총을 들고 발로 트럭을 운전하는 사람이 나오자 그 사람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북한에서 파견된 특수부대 사람이라고 하였음. 광주인민봉기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은 장갑차를 몰고 총을 쏘는 사람들이 남조선 사람들이 아니라 북한에서 내보낸 특수부대 사람들이라고 하였음. 회의에 참가해서 그런 말을 많이 들었음

o 1981년 초부터 북한 군인들과 사회간부들의 입에서 광주인민봉기에 북한의 특수부대 사람들이 참가했었다는 구체적인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 내용은 북한 전역으로 순식간에 퍼져 나감. 더하고 뺄 필요도 없이 5.18광주사건은 북한 정권과 군부에 의해서 계획되고 설계된 대남작전의 한 부분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지고 조작된 대표적인 사건임

o 5.18광주사태 당시에는 북한군 전부대가 전쟁상태에 돌입해 있었고 우리 부대도 진지에 나가서 전투식량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신발도 못 벗고 대기상태에 있었음. 매일 아침 2시간씩 진행하는 정치상학시간에는 방어사령부에서 나온 정치소조원들이 남조선 광주에서 일어난 인민봉기는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북한의 계획된 작전이며 많은 특수부대들이 침투해서 남조선 괴뢰군들을 제압하면서 광주시민들을 무장시켜 인민항쟁을 지원하고 있다고 하였음. 또한 광주폭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때를 맞추어 대규모 특수부대가 남조선으로 침투해서 전면전을 피하면서 배후교란작전으로 주요 시설물들을 파괴하면 사회혼란이 조성되고 이렇게 되면 남조선해방은 거의 확정적이라는 것이었음.

o 광주봉기가 끝난후 북한에는 어느날 갑자기 알지도 못하는 영웅들이 수많이 배출되었는데, 어떻게 되어 영웅이 되었냐고 물어보면 광주봉기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다 그곳에서 전사했다는 것이었음. 그들의 가족들과 자녀들이 당과 수령이 돌봐주는 애국자로, 혁명의 핏줄을 이어나갈 세대로 지목되어 오늘도 김정일의 관심속에 별로 근심걱정 없이 살고 있음

<에필로그>

□ 5.18광주에 북한 특수군이 왔느냐에 대한 문제는 국가 안보 차원의 문제이지 5.18단체들의 명예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북한이 광주에 특수군을 보냈다면 이는 국제법과 휴전협정을 위반한 북한의 불명예요 이를 잡아내지 못한 것은 국가의 불명예에 해당하는 것이지 결코 5.18단체나 광주시민들의 불명예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그런데 매우 기이하게도 5.18사람들은 북한군 소리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공격적으로 변한다. 5.18단체들이나 광주시민들은 간첩이나 위장한 북한 특수군을 감별해 낼 수 있는 능력도 없고, 그럴 임무도 가질 수 없는 자연인들이다. 그런데 무슨 능력으로 '광주에는 절대로 북한 특수군이 오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5.18광주에 북한 특수군이 왔을 것이라는 데 대한 증거들은 많이 있어도 5.18광주에는 북한 특수군이 절대로 오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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